전쟁 때 벌목꾼 트럭은 너른도화전 지나 모슬포로 달렸다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63) 하원동 화전

하원동 상잣 위에 너른도화전이 있었다. 과거 주민들은 지금의 마을을 하원, 영실 일대를 상원, 너른도 일대를 중원이라 불렀다. 조선시대 호적중초에는 너른도에 화전민 50명이 살았다는 기록이 있다. 1914년 일제가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면서 남긴 기록에는 하원동 주민 16가구가 너른도에 토지를 보유했다는 내용이 있다.

일제강점기와 제주4·3을 거치면서 이 일대 화전민은 점점 감소했고 지금은 과거 집터의 흔적도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한국전쟁시기 토벌대가 중문지역 지역민들을 동원해 하원동 산 2-1번지에 약 2,000평 가까운 주둔소를 건설했는데, 그 과정에서 기존에 남아 있던 화전민지 돌담을 가져다 이용했다. 영주암, 쌍계암이 있는 화전 지역의 집터 돌담은 완전히 사라지게 됐고, 주둔소 돌담은 이후 주변 목장에 담을 쌓을 때 사라졌다.


▲ 조선총독부가 1918년에 작성한 대정면 지도. 빨간 타원이 너른도화전이 있던 곳이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토벌대가 하원동에 주둔소를 건설하던 한국전쟁 기간, 나무를 베어 모슬포훈련소로 조달하던 개발단이 너른도를 지나기도 했다. 당시 모슬포훈련소 군인들에게 밥을 해주려면 나무가 필요했는데, 개발단은 제주 전 지역 산간에서 나무를 베어내 모슬포훈련소에 공급하는 일을 맡았다.

군(軍)이 자본을 대면 개발단은 벌목 민간업자를 구하고, 민간업자가 인부를 구해 나무를 베고 조달하는 방식이었다. 하원동 너른도화전 지역을 지나 산으로 오른 개발단 차량은 현 법정사 의열사 서쪽을 지나 830m 고지 ‘강정윤친밧’까지 올라 나무를 베었다.

‘강정윤친밧’에 대한 얘기는 지역민에게서 전해지고 있으나, 지명을 낳은 강정윤이 어디에서 온 화전민이고 어디로 내려갔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1914년 지적원도나 1918년 조선오만분일 지도에도 보이질 않는 것으로 봐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살다 어디론가 떠난 것으로 추정된다.

1948년 제주4·3이 일어나기 직전, 너른도화전에 속한 하원동 1848번지에 사람이 살고 있던 게 항공사진을 통해 확인된다. 이때까지도 화전민 가구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원동 지역민들은 너른도 화전민은 육도(산디=밭벼), 메밀, 감자, 콩을 재비하고 목축과 사냥도 했다는 얘기를 선대로부터 들었다고 증언했다. 그 외로 숯도 구웠을 것이고 일제강점기에는 ‘소쿠니모르’ 표고장(33°19'26.75"N,126°28'43.32"E, 850m 고지)에서 일했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 하원동에 남아 있는 표고장의 흔적(사진=한상봉)

하원동 1848번지는 일제강점기에 박재후가 살던 집이었다. 그런데 지역민의 구슬에 따르면, 변 씨 집안이 거기서 마지막까지 살다가 제주4·3이 일어나자 하원동으로 내려왔다. 이와 관련해 하원동 강상흥(1941생)은 좀더 구체적인 내용을 전했다. 색달동에서 이주한 변재덕이란 사람이 너른도에 살고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박재후의 밭을 변재덕이 사들여 거주했다는 내용이다. 땅의 소유권은 지금도 변 씨 집안 명의로 되어 있다고 한다.

화전지역에서의 땅 매매는 정주 여건이 형성되었음을 알게 해주는 단서이기도 한데, 화전에서 부를 형성한 이들은 화전 땅을 처분해 해안으로 이동하는 징검다리로 삼았던 경우도 있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 「남원읍 화전민 이야기」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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