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 모르는 인공지능, 세상에 필요한 건 인공지능의 심리학”
도민대학 ‘『순수이성비판』읽기 Ⅱ’ 제 5강 16일 저녁에 열려
오래된 질문, 오래된 재회
4월 16일 저녁 7시 서귀포시민 문화체육복합센터에서 진행된 <제주에서 순수이성비판 읽기2>가 다섯 번의 강의를 끝으로 마무리되었다. 마지막 강의에서는 존재와 하나에 대한 화두를 시작으로 수학에서 ‘1’의 존재에서부터 ‘하나님’에 이르기까지 정리하고 ‘인공지능’으로 마무리했다.
제주시에서 서귀포로 다섯 번을 왕복하는 동안 나는 무엇인가에 취한 기분이었다. 신학과 철학, 문학, 그리고 연극을 오가는 김상봉 교수의 열정적인 강의도 나를 취하게 한 요소였지만 핵심은 강의실의 분위기였다. ‘시민 강좌’의 모범이라고 해도 속색이 없을 만큼 수강생들의 열정이 나를 자석처럼 끌어당겼고, 오늘 비로소 그것의 실체가 번쩍 움직였다.
“칸트는 불가지론을 이야기했다고 들었는데요. 칸트는 혹시 신을 버린 게 아닌가요?”
질문을 한 수강생은 40년 동안 미처 하지 못했던 질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처음에는 40년이라는 숫자에 압도되었지만, 40년 동안 죽지 않고 가슴속에서 꽃피울 날만 기다리던 질문의 씨앗이 드디어 시민 강좌에서 부화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던 건 영광이었다. 40년 만의 질문이 본 행사였다면 40년 만의 ‘재회’는 훌륭한 부대 행사였다. 노 교수 두 명이 줌(ZOOM) 화면을 앞에 두고 마이크를 켜기 위해서 진땀을 흘렸다. 그나마 한쪽에서는 마이크가 켜지지 않아서 쪽지로 소통했다. 결국 상대편의 마이크는 끝내 켜지지 않아서 40년 전 철학개론을 들었던 학생은 화면 너머 은사님께 인사했고, 은사님은 웃음으로 미소로 화답했다. 40년 전의 어느 순간으로 돌아간 두 사람의 모습을 보는 건 특별한 경험이었다.
40년 만에 부화한 질문은 철학적으로 나를 각성시켰다. 김상봉 교수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가 신에 대해서 부정적 논설을 한 것은 사실이라고 인정하면서 과학적으로는 신은 있다거나 없다거나 증명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도덕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신은 존재해야 한다는 칸트의 입장을 강조했다.
철학에서 ‘윤리학’과 ‘정치학’은 특별한 지위를 가진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삶’을 살기 위한 윤리학이 요청된다고 주장했으며, ‘좋은 공동체’를 위해서 ‘정치학’이 요청된다고 말했다. 철학이 생활 세계와 만나고 호흡하는 통로가 바로 윤리학과 정치학인 것이다. 칸트가 신을 ‘요청’했다는 대목은 매우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도덕성을 자각하는 순간 우리는 신 안에 있게 된다.
나는 칸트가 윤리학을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가교로 삼은 대목에서 무릎을 쳤다. 칸트는 과연 상상력의 철학자였다.
“종합 일반은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것이지만, 순전히 상상력의 작용이다.”(순수이성비판 본문)
인간의 선한 의지가 신적(神的)이라는 것은 스콜라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거쳐 칸트 철학으로 이어진다.
“스콜라 철학자들 사이에서는 저 유명한 그 명제가 그런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 존재자인 것은 무엇이든, 하나요, 참이요, 좋다.”(순수이성비판 본문)
한편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 플라티노스는 ‘하나’가 과연 무엇인가 논쟁했다. 플라톤은 이데아가 하나이며 그 중에서 가장 제일은 ‘선의 이데아’라고 말했다. 플라티노스는 일자의 형이상학을 주창하면서 ‘하나’가 존재의 근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는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결과이며 ‘정신’만이 하나일 수 있다고 말했다.
서양 철학은 “하나를 말하는 사람 VS 정신을 말하는 사람”으로 나뉘었으며 이 충돌을 종합하는 임무는 그리스 철학이 이어받았다. 하지만 기독교 철학 전체는 ‘정신’을 강조함으로써 아리스토텔레스가 판정승을 거두었다고 평가받았다.
김 교수가 동료 수학 교수에게 ‘1이 무엇인가요?’라고 질문했던 경험담은 재밌었다. ‘갑자기 궁금한 게 있으니 우리가 놀던 맥주집으로 와주시오.’ 거길 또 바람처럼 한달음에 찾아온 수학자도 귀여웠다. 수학자는 ‘1은 존재입니다.’라고 대답했다. 1이 숫자가 아니라는 사실은 그리스 학자들이 이미 밝혔다고 한다. 1은 실체이며 ‘있음’이다. 그리스 자연철학자 파르메니데스는 ‘전체는 존재’이며 ‘전체는 있음’이라고 말했다. 전체는 외부가 없는 것이며, 외부가 없는 게 있음이다. 따라서 있음을 탐구하면 전체를 탐구할 수 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서양 학문은 ‘있음’에 대한 지각으로 인해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인공지능의 심리학’의 문은 아직 닫혀 있다
요즘 노벨 생리학상 수상자들의 분포를 보면 기억 연구가 많다고 한다. 뇌과학의 출발이 기억의 문제이기도 하며, 정신의 존재 그 자체가 기억이기 때문이다. 김 교수는 ‘기억은 성부와 같고, 인식은 성자와 같고, 사랑은 성령과 같다’고 말했다. 인간의 마음이든 기계의 마음이든 기억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김상봉 교수는 설명을 마무리하면서 다시 인공지능 이야기로 돌아갔다. ‘인공지능의 심리학’은 매우 절실한 상황이지만 의외로 관심이 저조하기 때문에 아쉽다고 덧붙였다. 인공지능의 심리학이란 과연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피조물인 인공지능과 인간의 같고 다른 점은 무엇이고 밖에서 주어진 데이터와 창발적인 정보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 하는 질문이 포함될 것이다.
상처와 고통에 대한 이야기를 인공지능과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았지만 인공지능이 고통받을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인공지능의 심리학에서 ‘고통’의 문제는 빼놓을 수 없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존재와 고통은 같은 말이며, 인간은 상처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상처받지 않기 위해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잘 상처 받기 위해서 도전하는 존재”다. 나는 상처받음으로써 내가 된다.
김 교수는 “이번 칸트 강의의 요점은 인공지능”이라고 예고했다. 예고한 대로 강의의 시작과 끝은 인공지능이 차지했다. 수강생으로서 인공지능과 칸트를 연결시킨 김 교수의 기획에 동감하면서 의문 나는 점을 질문으로 남겨 둔다. 김 교수는 ‘질문의 철학자’로서 칸트의 위대함에 주목했고, 책을 읽을 때는 작가가 무엇을 질문하고 있는지 주목하라고 하다.
칸트 수업을 받으면서 내가 생각했던 질문은 인공지능의 창조자로서 인간의 ‘건강성’에 관한 우려였다. 김 교수는 창조자 신과 피조물 인간의 관계가 인공지능으로 이동하면서 창조자 인간과 피조물 인공지능의 관계가 되었다고 설명했지만 나는 이런 도식에 의문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신’을 하나라고 하였고, 칸트가 ‘선’을 하나라고 했다면 ‘신’은 요청된 존재이다. 인간은 신의 피조물이 아니며 창조자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칸트는 초월적인 존재로서의 신을 기각했을 뿐 아니라 인간이 의식할 수도 이해할 수도 대상으로 만날 수도 없으며 다만 선한 행위를 함으로써 신 안에 머무를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칸트가 말하는 신은 인간의 선한 의지에 대한 근거로서 작용한다. 인간이 자신의 도덕과 선한 행위의 근거로서 신을 요청하였다면 ‘피조물’이라는 인간의 지위 역시 기각되므로 ‘신-인간’에서 ‘인간-인공지능’이라는 ‘창조자-피조물’ 도식 역시 재구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인공지능을 창조한 인간에게 시사점을 줄 수 있다. 프랑켄슈타인은 피조물의 이름이 아니라 창조자인 과학자의 이름이다. 피조물은 이름조차도 없다. 프랑켄슈타인이 피조물을 창조한 순간 혐오감과 절망감을 느꼈기 때문에 방치한 것이다. 창조자가 혐오감을 느낀 까닭은 아름답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보기 좋았다’면 좋았겠지만, 피조물을 만든 인간은 좋지 않았던 것이다.
한편 강제로 창조당한 피조물은 자신의 창조주에게 최소한의 요구를 제시했지만 거절당했고 배척받으며 울분이 쌓인다. 분노를 참을 수 없었던 피조물은 창조자의 주변을 파괴하였고, 창조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고, 주변의 모든 것이 파괴된 프랑켄슈타인은 마지막 숨이 끊어졌다.
김 교수는 인공지능을 창조한 순간 인간은 창조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인공지능을 창조한 인간은 근본에서부터 자기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주변 세계의 파괴를 피할 수 없다. 인공지능이 탄생한 순간부터 인간의 주변 세계는 변화를 넘어서 파괴되기도 하고 형성되기도 했다. 이런 변화가 파멸적인 결말이 될지 그 반대가 될지는 인간이 실존적으로 도약하고 거듭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달려 있다.
신과 인간, 인공지능에 칸트의 상상력을 보태서 다리를 연결한다면 그것은 ‘선(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인공지능을 사람을 돕고, 아픈 사람의 고통을 줄이거나 없애고, 배고픈 사람을 배부르게 하는 데 쓴다면 인공지능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사라질 것이고, 인공지능의 심리학도 돈독해질 것이다.
주역(周易) 점을 치는 원리는 공익을 질문하되 사적 이익을 질문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사적 이익에 관한 질문을 던지면 점괘가 나타나지 않는다고 한다. 인간을 선(善)으로 이끄는 신에 대한 칸트의 철학에 힘입어 서양 기독교가 버틸 수 있었다는 김 교수의 강의를 들으면서 나는 ‘선에 목마른 인간’이라는 이미지를 얻었다. 과연 온 우주가 간절한 마음으로 인간의 선행을 기다리고 있다. 많은 사람의 선행으로 성사된 <제주에서 칸트 읽기> 강의처럼.
오승주
제주 성산포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어촌 소년처럼 10년간 사춘기, 놈팽이로 살다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동양철학을 좋아해 서당에 다녔고 공자를 지적으로 스토킹했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왔다. 제주4.3과 제주신화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지망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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