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다, 매서운 겨울 견디고 마침내 우뚝한 꽃

[주말엔 꽃] 마당에 배추꽃

겨울이 지나면서 마당에 노란 손님이 찾아왔다. 얕은 뿌리에서 하늘을 향해 장다리(꽃줄기)를 쏘아 올리더니, 그 끝에서 둥글고 노란 꽃 뭉치를 펼쳤다. 배추꽃이다.

아내는 지난 가을, 마당 텃밭에 배추를 심었는데, 제대로 포기가 서지 않았다. 그래도 아침마다 퍼진 배추에서 잎을 뜯어내 찬을 만들었고, 배추에선 새 잎이 돋았다. 그러다가 겨울이 지나자 장다리가 오르고 꽃이 피었다. 배추 포기가 만들었으면 포기 째 김장을 하던가 했을 텐데,  그러지 않아 오히려 꽃까지 보게 된 것이다.


▲ 마당에서 배추가 꽃을 피웠다.(사진=장태욱)

배추는 18~22℃ 내외의 서늘한 기온을 좋아하고 볕이 드는 곳에서 잘 자란다. 봄배추는 4월 중순 경에 씨를 뿌리고 5월 중순에 정식한 후 7월 초면 수확한다. 가을배추는 8월 중순에 씨를 뿌려 9월 정식하고 11월 상순에 수확한다. 봄이나 가을이나 18~21℃가 생육을 위한 적정온도인데, 5℃ 이하에서는 생육이 정지된다.

저온에서 생육이 정지되지만 추위에 견디는 힘은 강한 편이라 생육 초기에는 영하 8℃에서도 얼어 죽지는 않는다. 오히려 한파를 견딘 후에 맛이 달아지는 특징이 있다. 다만, 13℃ 이하 낮은 온도에서 일정 기간이 경과하면 꽃눈이 생기고, 꽃눈이 생긴 후 날이 따뜻해지고 일조시간이 길어지면 장다리가 올라와 꽃을 피운다. 그러니까 봄에 피어난 배추꽃이란 매서운 시련을 견디어 자만이 도달할 수 있는 예술적 경지와도 같은 것이다.


▲ 배추는 추위를 견딘 후에 장다리를 올려 그 끝에서 꽃을 피운다.(사진=장태욱)

菜花嬌映晝(채화교영주) 애교 있게 배추꽃이 한낮에 피었거니
繁朶透疏籬(번타투소리) 번다하게 성긴 울에 꽃송이를 비추더라.
一夜風和雨(일야풍화우) 하룻밤 새 바람 불고 또 비도 섞여 오니
榮華亦暫時(영화역잠시) 아름답던 영화도 잠깐뿐이었구나.


매월당 김시습(1435~1493)이 남긴 菜花(채화, 배추꽃)라는 시다. 김시습은 세조가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자  세속과 연을 끊고 승려가 되었다. 그는 권력과 타협하지 않았고, 화전을 일구고 방랑하며 글을 지었다.

매월당은 스스로 밭은 일궜기에, 배추꽃을 소재로 시를 지었다. 배추꽃이 화사하게 피었다가 비바람에 떨어지는 것을 보면서, 세상 화려한 것들이 잠시의 일임을 경계한다.


▲ 장다리 끝에서 꽃눈마다 꽃을 피워 수국처럼 둥근 모양을 만들어낸다.(사진=장태욱)

비록 잠시 머물다 사라질 일임을 알면서도 마당에 찾아온 배추꽃이 여간 고맙고 반갑지 않다. 얕은 뿌리에 기대어 매서운 겨울을 견디고 봄을 향해 우뚝 장다리를 쏘아 올렸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고 보니 배추꽃은 민초들이 광장에서 일궈낸 찬란한 역사와도 많이 닮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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