귤꽃 지면 하얀 치자꽃과 수국 잔치, 난 주인공이 됐다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⑩] 책방을 돋보이게 하는 귤밭의 보물

꽃꽂이를 배우러 다닌 적이 있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 가는 꽃꽂이 수업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지요. 꽃을 꽂을 때만큼 행복한 시간이 없었거든요. 꽃을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답니다. 기다렸던 꽃꽂이 수업을 하러 가면 바스켓에 오늘 꽂을 꽃들이 한아름씩 테이블 위에 올려 있었습니다. 먼저 꽃꽂이 선생님이 시범을 보이며 꽃 이름과 꽃꽂이 유형을 설명해줍니다. 항상 제일 먼저 꽂는 건 주인공 꽃이 아닌 초록한 잎들이었습니다. 초록의 풀잎들을 오아시스에 채웁니다. 그리고 맨 마지막에 메인이 되는 꽃을 꽂지요. 그때 알았습니다. 풀과 같은 초록한 잎들이 없으면 메인 꽃은 전혀 돋보이지 않는다는 것을요. 그냥 꽃만 덩그러니 있을 때보다 초록 풀과 함께 있을 때 꽃은 훨씬 돋보인다는 것을요.


▲ 5월, 책방 주변에 귤꽃이 하얗게 피었습니다. 귤꽃의 향기에 취해 정신이 몽롱할 지경이었습니다.(사진=키라)


제가 운영하던 책방이 제주 귤 과수원 안에 있다고 하면 다들 감탄합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귤밭이 없고 책방만 덩그러니 있었다면 뭔가 허전할 것 같기도 합니다. 책방 주변에 있는 귤밭이 책방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다고 생각하니 감사했지요. 사실 이 귤밭 안에는 귤나무만 있는 게 아니거든요. 저는 ‘귤밭 안 보물창고’라는 말을 종종 하는데, 책방 주변에는 제주의 계절을 알려주는 수많은 배경들이 있답니다.

맨 먼저 달래, 방풍, 당귀가 귤나무 밑에 숨어있습니다. 어린 순들을 뜯어다 샐러드를 해 먹으면서 봄을 느끼고요. 4월 말 정도가 되면 새하얀 귤꽃이 가득 피기 시작해서 온 동네에 은은한 귤꽃향이 퍼집니다. 귤꽃이 지고 나면 머지않아 향이 진한 하얀 치자꽃이 피고, 물을 가득 머금은 수국이 활짝 핍니다. 제주 사람들은 수국을 싫어한다고 했습니다. 수국이 피면 장마가 오는 신호니까요.


▲ 귤꽃이 지면 하얀 치자꽃이 꽃잎을 펼칩니다. 여름의 향연의 시작됩니다.(사진=키라)

또 책방 바로 옆엔 존재감을 드러내는, 커다란 하귤나무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한의원에서 하귤껍질을 한약재로 사용했다고 해요. 그래서 하귤을 한약방에서 전부 따갔다고 합니다. 5월이 되면 노란 하귤이 주렁주렁 매달립니다. 동네 언덕 너머에서도 이 하귤나무가 보일 정도로 큰 나무입니다. 어떤 책방손님은 동네 구경을 하다 언덕에서 커다란 하귤을 보고 책방을 찾아온 적도 있었답니다. (하지만 이 하귤나무는 마을 도로 확장공사로 인해 가지가 모조리 잘려나가서 본래 풍성했던 모습은 사라져버렸어요.)

책방 앞 흰 백합들이 가득 피면 이제 정말 더운 여름입니다. 책방 북쪽 창문에 있는 토란대들도 줄기를 길게 뻗어내고 쑥쑥 올라옵니다. 비가 내리는 여름날, 이 토란잎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보고 있으면 개구리 왕눈이가 생각나지요. 토란잎을 툭 꺾어 우산 삼아 쓰고 있으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다고나 할까요?


▲ 방풍 잎입니다. 초록 잎은 샐러드 재료로 그만입니다.(사진=키라)

가을이면 책방 주변은 주황색 귤들로 가득해집니다. 제주에서 경관이 뛰어난 열 곳을 이르는 말 <영주십경>에 제주의 가을을 ‘귤림추색(橘林秋色)’이라 표현한 단어가 있습니다. 귤이 익어가는 제주성에 올라 주렁주렁 매달린 귤을 바라보며 감상하는 일을 뜻하는 말이지요. 책방 앞 귤밭이야말로 ‘귤림추색’의 최적의 장소랍니다. 겨울이 오기 전 책방 뒤 유자나무에 유자도 달리기 시작한답니다. 노지귤을 다 따고 진짜 겨울이 오면 책방 앞에 있는 노지한라봉이 노지귤의 자리를 대신 합니다. 그리고 한라봉 나무들 사이 뒤에 숨겨진 댕유지나무가 한그루 있습니다. 프랑스에 뱅쇼가 있다면, 제주에는 댕유지가 있지요. 요즘은 귀한 댕유지를 따다 생강이랑 대추를 넣고 댕유지청을 만들면 겨울철 감기 걸렸을 때 이만한 감기약이 없다고 해서 저도 제주 사람들처럼 댕유지청을 만들어 놓곤 합니다.


▲ 겨울, 동백꽃이 책방을 붉게 물들입니다. 책방을 보물창고로 만드는 마지막 색을 입힙니다.(사진=키라)

눈이 내리는 추운 겨울, 동백나무에 빨간 동백꽃이 피기 시작합니다. 귤밭뿐만 아니라 귤밭 사이에 있는 온갖 나무와 풀들이 책방의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던 겁니다. 키라네 책부엌이라는 공간이 더 빛나 보였던 건 제주의 자연이 키워준 이 책방의 배경들 때문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누군가에게 그런 배경이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저 존재 만으로도 고마운 배경 말입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갑니다.
이 글은 책<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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