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트럼펫을 닮은 꽃, 이 땅의 터줏대감이었다

[주말엔 꽃] 참깨 꽃

길가 과수원 한 모퉁이에 참깨가 꽃을 피웠다. 꽃이 핀 줄기 아래에 꼬투리가 줄줄이 맺힌 것으로 보아 막바지 꽃이다. 트럼펫을 닮은 하얀 꽃이 비에 젖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빗물에 향기가 씻겼을 텐데, 비가 그치자마자 꿀벌이 달아들어 꽃을 파고든다. 이러다 소나기라도 만나면 꽃 속에 숨어 비를 피할 태세다.

아카시아 꽃이 진 이후 8월까지, 여름은 밤꽃, 대추꽃 등을 제외하고는 벌의 먹이가 될 만한 꽃이 부족한 시기다. 장마에 들면 꿀벌의 활동도 크게 떨어지고 병에 걸리는 벌이 많아진다.


▲ 소나기가 내린 날, 잠시 비가 그친 사이 꿀벌이 참깨 꽃 주변으로 날아왔다.(사진=장태욱)

밀원 꽃이 줄어들고 장마마저 오래 지속되자 벌들은 매우 답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그리고 잠시 비가 그친 사이에 참깨 꽃향기를 맡고 날아왔을 터인데, 이들의 용감한 모험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길 바랐다.

참깨는 6월부터 줄기 아래에서 위로 순차적으로 꽃을 피운다. 그리고 그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꼬투리가 달리는데, 참깨는 꼬투리마다 작은 씨앗으로 꽉 채운다. 8월 말이면 줄기와 꼬투리가 갈색으로 변하는데, 수확을 해야 할 시기가 되는 것이다.

1970년대 초반 서귀포에 감귤이 널리 퍼지기 전인데, 부모님은 참깨를 재배했다. 돈이 귀하던 시절이라 참깨를 재배해 장에 내다팔면 손에 돈을 조금이나마 쥘 수 있었다. 서귀포오일시장이 솜반천 인근에 있던 때인데, 누구나 장에서 상품을 팔 수 있었다. 어머니가 참깨를 구덕에 담고 노상에서 파는데, 지나는 사람이 ‘참깨가 잘 여물었다’고 말하는 걸 듣고 어린 나이에도 우쭐한 마음이 들었다. 참깨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이다.


▲ 꽃이 줄기 아래에서부터 위로 핀다. 꽃이 떨어진 자리에는 꼬투리가 달린다.(사진=장태욱)

참깨에는 50%의 지방과, 25%의 단백질, 15%의 탄수화물을 함유한다. 리놀산과 레시틴이 많이 들어 있어서 동맥경화와 고혈압 환자에게 좋다. 칼슘과 철분이 많아 뇌 활동을 원활하게 도와주고 불포화 지방산을 품고 있어 피를 맑게 해준다.

참깨는 아프리카 사바나 지대가 원산지로 알려졌다. 아프리카에서 바닷길을 거쳐 아라비아, 인도, 스리랑카, 동남아시아 등으로 전해졌고, 다시 육로를 통해 지중해 연안과 인도, 중국, 한국, 일본 등에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일본문헌에 백제로부터 참깨가 도입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 이전에 한반도에 도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송나라에서 사신단의 일원으로 고려에 온 서긍(徐兢)이 정리한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실린 글에도 참깨가 나온다.

그 땅에는 메조(黃粱, 조의 일종)⋅옻기장(黑黍)⋅조(寒粟)⋅참깨(胡麻)⋅보리⋅밀 등이 있다. 쌀은 멥쌀이 있으나 찹쌀은 없고, 쌀알이 특히 크고 맛이 달다.

당시는 참깨를 호마라고 불렀는데, 쌀과 조, 기장, 보리, 밀 등과 더불어 고려를 대표하는 작물이었다.


▲ 참깨의 꽃은 흰색 트럼펫을 닮았다. 줄기에서 가장 나중에 핀 꽃이 꼭대기에서 빗물을 머금고 있다.(사진=장태욱)

참깨에서 뽑아낸 참기름은 우리나라 음식 빠질 수 없는 식물성 기름이다. 고소한 향을 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영양소를 함유하고 있다. 우리 음식 가운데 건강하고 고소한 음식에는 어김없이 참기름이 들어있다. 특히, 나물무침, 잡채, 채조조림 등 맛있는 사찰음식에는 참기름이 필수다.

세조실록 1466년(세조 12) 3월 21일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왕이 호조(戶曹)에 전교하기를, “중미(中米) 3백석·찹쌀 10석·참깨 20석을 금강산 여러 절에 시주하라.”라고 하였다.

세조는 조선의 왕 가운데 불교를 숭배한 것으로 유명하다. 조선시대 금강산 주변에는 보덕암, 유점사, 신계사, 표훈사, 장안사, 정양사 등 유명한 사찰이 많았다. 세조는 이들 사찰에 쌀과 찹쌀과 더불어 참깨를 보내라고 지시한 것이다.

1석은 부피의 단위로 약 180리터에 해당한다. 참깨 알의 크기를 감안했을 때 참깨 20석은 엄청난 양이다. 세조의 불교 사랑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 참깨 밭(사진=장태욱)

이렇게 우리 식탁에서 사랑을 받았던 참깨가 지금은 점점 들녘에서 사라지고 있다. 외국산이 밀려오면서 국산 참깨가 설 자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 주변에 보이는 것은 대부분 가정에서 먹을 것을 자급하는 용도이고 환금작물로 재배하는 농민은 드물다.

이 땅에서 참깨가 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