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날리는 날, 윤동주가 늙은 교수 강의에 가던 교정을 걸었다

[교토-오사카 여행기] ③ 정지용·윤동주 유학했던 도지샤(同志社) 대학

교토 여행 첫날, 신발이 흠뻑 젖을 만큼 비를 맞았다. 일정을 조금 줄여서 저녁엔 숙소에서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봤다. 한국에선 보지 못한 ‘폭삭 속아수다’를 교토에서 절반 이상 봤다.

이튿날 하늘이 화창하게 갰다. 도시샤(同志社) 대학을 가기로 일정을 정했는데, 맑게 갠 날씨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교토를 무척 사랑하는 어느 작가는 나에게 교토는 산책하기 좋은 도시라서 산책하는 사람이 많다며  산책을 하고 싶으면 아침 일찍 하는 게 좋을 것이라고 정보를 주었다.


▲ 도시샤 대학에 들어서면 고풍스러운 건물이  눈을 사로잡는다.(사진=장태욱)

버스를 타고 도시샤 대학 근처에 도착하니 교토가 산책하기 좋은 도시라는 걸 실감할 수 있었다. 겐부공원(玄武公園)이 넓게 펼쳐지고, 주변에 묘각사, 서림사, 서원사 등 사찰이 즐비했다. 또, 초등학교와 중학교들이 있는데 높은 건물도 자동차도 많지 않고 상가도 거의 없다. 번잡하지 않아 마음의 휴식을 얻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곳이다. 이 도시의 분위기가 시인 정지용과 윤동주의 문학이 익어가는 배경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도시샤 대학

도시샤 대학은 1875년 에도시대 무사의 아들이었던 니지마 쇼에 의해 건립됐다. 니지마 쇼는 신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에서 유학했는데, 필립스 아카데미, 엔도버 신학교 등에서 공부했다고 한다. 서양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학위를 받은 최초의 일본인이었는데, 일본에 돌아와 학교를 세운 게 도시샤 영어학교다.

도시샤 대학은 기독교주의, 자유주의, 국제주의 등 세 가지를 기본 교육이념으로 삼는다. 학교법인 고시샤는 도시샤 대학 외로도 유치원 1개소와 초등학교 2개소, 중·고등학교 4개소, 도시샤 여자대학 등을 운영한다. 대학 주변에는 개교 150년을 기념하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 도시샤 대학 창립 150주년을 기념하는 현수막에 게시됐다.(사진=장태욱)

■ 정지용과 윤동주

정지용은 1923년에 이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고, 윤동주 시인은 1942년에 교토 릿쿄대학(立敎大學) 영문과에 입학했다가 그해 가을에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학했다. 정지용은 1902년생이고, 윤동주는 1917년생이니 나이로는 15살 차이가 난다. 일본 유학을 시작한 시기는 19년 차이가 난다.

도시샤 대학 정문에 들어서면 멀지 않은 곳에서 두 시인을 기념하는 시비를 찾을 수 있다. 5미터 남진한 거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는데, 먼저 세워진 건 윤동주 시비다. 도시샤 대학에서 윤동주를 기리는 클럽이 1995년에 세웠다고 한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2005년에 옥천문화원, 정지용문학회 등이 주도해서 정지용 시비를 세웠다.

윤동주의 시비가 일찍 세워진 데에는 짐작할 만한 이유가 있다.

우선, 윤동주 시인이 일본 감옥에서 불행하게 숨을 거둔 것에 대해 이 대학 구성원들이 느꼈을 안쓰러움이 컸을 것이다. 도시샤 대학을 중심으로 윤동주를 기념하는 활동이 지속되었다니, 대학 구성원이 윤 시인을 바라보는 시선을 짐작할 수 있다.

정지용 문학이 오래도록 우리사회에서 금기된 것도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정지용은 한국전쟁 당시에 행방불명됐는데, 자진 월북한 것으로 오해를 받았다. 그의 시는 오래도록 문단에서 매몰됐다가 1988년에 이르러서 해금됐으니, 그를 기념하는 활동이 늦어질 수밖에.


▲ 이 대학 학생 그룹이 윤동주 시비 앞에서 무언가 기록하는 장면이다.(사진=장태욱)

고풍스러운 대학 건물 아래로 벚꽃이 바람에 날리고 있다. 윤동주와 정지용을 만나기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신입생으로 보이는 학생 그룹이 윤동주 시비 앞에서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었다.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니 대학 생활이 즐겁고 행복한 모양이다. 우리 시인을 기억해주는 일본인들이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 교정을 둘러보니 윤동주 시인의 ‘쉽게 쓰여진 시’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올랐다.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그가 강의를 들으러 가던 바로 그 길에 서서 내가 평생을 되뇌던 구절을 다시 떠올렸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20대 후반에 성찰과 회한이 이토록 짙게 배인 시를 썼다니, 그것만으로도 전 국민의 사랑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글을 쉽게 쓰지 말자는 마음, 윤동주의 시에서 비롯되었으니 나도 시인에게 큰 빚을 졌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