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초처럼 산뜻한 향기 안에 미래의 알싸함을 담은 꽃
[주말엔 꽃] 마당에 당유자 꽃
밤에 폭우가 쏟아졌는데, 날이 밝자 감쪽같이 날이 갰다. 밤에 내린 비는 흔적도 없고, 푸른 하늘 아래로 햇살이 쏟아졌다. 그 비 때문일까, 당유자 나무가 기다리던 꽃망울을 터트렸다. 흰 꽃을 터트리기 위해 밤새 비바람이 그토록 요란하게 불어닥친 모양이다.
당유자는 제주도 전통 재래종 귤 가운데 한 종이다. 전 세계에 재배되는 귤은 2000종에 달할 정도로 다양하다. 그 가운데 제주도 재래종으로 분류되어 남아 있는 건 12종으로 알려졌는데, 그중 대표적인 게 당유자다.

1777년(정조 1), 정조 시해사건에 연루돼 제주도에 유배된 정헌 조정철은 유배 기간의 보고 느낀 것을 시문으로 기록했다. 그걸 묶어놓은 책이 『정헌영해처감록(靜軒瀛海處坎錄)』인데, 지난 2006년 제주문화원의 노력으로 번역본이 출간됐다.
조정철은 유배 기간, 많은 시간을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보냈는데, 당시 제주도에서 재배되던 귤 품종에 대해서 귤유품제(橘柚品題)이라는 소제목으로 분류해 기록했다. 조정철이 소개하는 귤은 유감(乳柑), 별귤(別橘), 대귤(大橘), 당금귤(唐金橘) 등을 포함해 14종이다. 그 가운데 유자를 제외하곤 대부분 이름이 생소하다. 지금 소비자들에 익숙한 한라봉, 천혜향, 황금향, 레드향은 물론이고, 조생귤도 근·현대에 일본을 통해 들여온 것이다.

조정철은 당유자(唐柚子)에 대해 ‘몸체가 가장 커서 큰 것은 한 되가 되고도 남을 만하다.’며 ‘맛은 시면서 아주 달아 조금 먹다가 그만두게 된다.’고 했다. 그리고 ‘비교하자면 호걸의 인사나 시와 술을 잘하는 나그네다.’라고 했다.
당유자는 재래귤 가운데 열매가 가장 크다. 가을에 호리병 같은 게 나무에 매달려 있으면, 누구든지 탐스러운 느낌이 든다.

조정철이 ‘맛이 시면서도 달아서 먹다가 그눔두게 된다.’라고 했듯이, 당유자는 생과일로는 먹기 곤란한 과일이다. 대신, 제주도사람들은 당유자를 ‘뎅유지’ 혹은 ‘뎅우지’라고 불렀는데, 약재로 사용했다. 집안에 기운이 없는 사람, 감기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마늘, 생강과 함께 당유자를 끓여서 그 국물을 마시게 했다. 부엌에서 당유자를 끓이는 날이면, 집안 전체에 알싸한 한약 냄새가 진동을 했는데, 그 냄새 만으로도 기(氣)가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당유자는 가지의 끝 부분에 꽃망울이 뭉쳐서 나온다. 그런데 꽃망울이 한꺼번에 나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같은 자지에 난 것이라도 크기가 제각각이다. 처음에 좁쌀만 했던 꽃망울이 쌀 튀밥만큼 커지면 비로소 꽃잎을 활작 펼친다. 당유자 꽃의 꽃잎은 다섯 장이다. 꽃망울이 꽃잎을 펼치면 안에 생식을 위해 감춰둔 암술과 수술이 드러난다.


귤 꽃은 대부분 난꽃처럼 산뜻한 향기가 난다. 당유자 꽃도 그냥 냄새를 맡으면 비슷하다. 그런데 꽃을 손으로 문질러서 냄새를 맡으면 당유자 열매처럼 알싸한 한약 냄새가 풍긴다. 자신이 미래에 펼쳐놓은 향기마저도 꽃 안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마당에 당유자 꽃이 찾아왔다. 이제 나무가 여름을 준비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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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