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정령 떠날 채비 하는데 어쩌랴, 이 어여쁜 것들을!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④]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4) 원물오름

 드러나 보여서 소중함을 잊고 있는 것

중산간이라는 곳은 현대인들에게 어쩌면 불편하고 낯선 공간일 수밖에 없다. 보전이라는 미명하에 그럴싸하게 만들어 놓은 이곳은 금세 흥미를 잃고 애물단지 취급, 새들과 뭇 생명체들만 찾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글에 나타난 멋진 풍광과 울긋불긋한 꽃들의 잔치가 벌어질 때 관심을 보이고 찾게 된다.


▲ 원물오름은 물을 품은 오름이다. 오름 앞에 연못이 있다.(사진=김미경)

원물오름은 물이 있어 형성된 오름이라고 전한다. 오름 초입에 물은 떡하니 지나가는 사람들을 맞이한다. 오름을 찾는 사람들에게는 원물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멀리서부터 궁금증으로 달려온 이들에게 정상가는 길이 바빠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을 위해 단장도 해 놓았지만 한 컷의 증거 사진만 남길 뿐이다. 어쩌면 드러나 보이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금은 정돈된 듯한 초입, 왼쪽 비탈길을 따라 올라갔던 기억과는 달리, 누군가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다 보니 오른쪽 능선으로 향하고 있었다. 발길에 드러나 있는 흙은 위태롭기까지 하다. 물줄기가 흘러내려 만들어 놓았을까, 가축들이 넘나들며 파헤쳤을까, 어쩌면 수많은 사람의 발길로 만들어 낸 생채기일지도 모른다. 왕성했던 여름을 보낸 키 작은 나무들과 가시덤불들이 조금씩 고개를 떨어뜨리어 지나가는 이들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 있다. 낮은 곳의 야생화에 매료되어 시간 가는 줄 모르는 발길, 허리 펴고 뒤를 돌아 잠시 숨을 고를 때 바라본 남쪽의 바다 풍광에 쏙 빠진다.

 360도 어느 곳 하나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다

가을 색이 짙어가고 있었다. 절정에 이르러 푸르렀던 초록 정령들은 물을 단절하면서 본연의 색을 드러내고 겨울나기를 준비하는 모습이다. 불어오는 바람에 포르릉 떨어지는 낙엽, 잠시 아련함을 느끼며 발길을 멈춘다. 서서히 찬 기운을 머물고 오겠지만 이곳은 여전히 가을을 즐기기에 한창이다.


▲ 꽃향유에 나비가 붙어 있다.(사진=김미경)

꽃 내음새가 없는 산박하, 꽃받침과 엉성한 잎자루의 가시가 위협적이지만 영롱한 보랏빛으로 유혹하는 엉겅퀴, 앙증맞은 진노랑 꽃들이 한 다발로 피어 있는 미역취, 넘실대는 ‘새(풀 종류)’와 함께 연보랏빛 어깨춤을 추는 쑥부쟁이, 여기저기 능선에 가을의 향기를 맘껏 드러내고 있는 꽃향유 등 많은 야생화들이 늦가을 나비들을 바쁘게 만든다. 발길을 옮기는 이들에겐 잠시 쉬어가라 유혹한다.

저 멀리 한라산 정상이 구름에 가렸다 나타나기를 반복한다. 이곳에서 보이는 서영아리, 조근대비악은 더욱 반갑기만 하다. 휘휘 돌아 서남쪽 곶자왈을 만든 병악과 남쪽 방향의 랜드마크라고 할 수 있는 산방산, 최남단 마라도를 돌아 차귀도까지, 한곳에 서서 360도 방향만 틀면 조우할 수 있는 풍광들이다.


▲ 원물오름을 오를 때 만나는 들꽃들. 왼쪽 위 : 꽃향유/ 오른쪽 위 : 미역취/ 오른쪽 아래 : 자주쓴풀/ 왼쪽 아래 : 엉겅퀴(사진=김미경)


 그 이름이 정겹다 고고리암, 제주도 사람들은 정상을 '고고리'라 불러

화산이 폭발하며 분출할 때 돌(암석조각)과 먼지 같은 화산재가 용암과 함께 나오는데 이곳 정상에서는 암석과 용암 덩어리가 공중을 유선형으로 날아가다 떨어진 화산탄이 곳곳에 보인다. 우뚝 박혀 있는 바위를 이곳 사람들은 ‘고고리암’이라고 불렀다. ‘고고리’는 이삭 또는 봉우리를 뜻하는 제주어, 아마도 정상에 떡하니 있는 모습에 붙여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동광육거리, 원형로타리를 돌면서 동서남북 여섯 방향으로 향한다. 수많은 차량이 쉴 새 없이 달린다. 옛날에도 마차나 말들, 수많은 사람이 이곳을 지나쳤으리라. 옛날이나 지금이나 교통과 연락의 편의를 위해 시설들이 들어선다. 갈 길이 먼 사람들에게는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편의시설은 필수적, 아마 물은 불가결의 요소였다. 분명 지명은 그곳의 지형지물을 보고 지었을 터, 원물오름은 옛날 편의시설이었던 국영 여관을 ‘원’이라 불렀다고 하는데 그곳에 물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원물오름 지명에 붙은 설설설, 원물오름은 ‘물을 품은 오름’이란 뜻

그럼 그 전에는 어떻게 불렸을까 궁금해진다. 고대인들은 물이 있는 오름을 ‘돌오름’으로 불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그 의미를 정확히 모르고 발음만을 따라 부르다 보니 돌과 함께 파생한 ‘도레’ ‘두리’ 등의 발음에서 둥근을 의미하는 ‘원’을 소환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물은 둥글다는 뜻과는 전혀 무관한 오름이기에 ’원‘ 음가자를 동원한 것, 원물오름은 물+물을 의미한다고 한다.

원수악의 ‘원’이 집 원(院)이라고 해서 여관을 소환하지만, 원앙 원(鴛)자를 쓴 원수악(鴛水岳)이라는 기록도 있다. 그 외에도 으뜸 원자를 쓴 원수악(元水岳), 관이름 완자를 쓴 완수악(阮水岳)이라는 이름도 나온다. 이 오름의 이름은 한자로 표기한 것만 14개가 있다고 하니 오름 지명을 이야기할 때 자기 편한 대로 해석하는 것은 혼란만 부추기는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제주 오름 중 ‘원’을 가지고 있는 오름은 이 오름 외에 원당봉이 있다. 협재리에는 ‘원물’이라 부르는 용천수가 있다. ‘원’이 들어간 지명은 참 많다. 원물이라 부르는 곳이 여관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지나친 자기주장이 아닐까.

동광육거리에서 구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서측에 보이는 오름이 ‘원물오름’이다. 서귀포방향에서든 제주시 방향에서든 길게 늘어진 모습은 어떤 곳일까 지나가는 이들에게 궁금증을 유발한다.

원물오름
서귀포시 동광리 산 41번지
표고 458.5미터, 자체 높이 98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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