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오름을 삼켜버린 맑은 호수, 어쩌다 여기에?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③]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3)

오름정상을 올라 능선을 도는 동안에 한라산 정상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는 곳, 이른 봄부터 늦은 겨울까지 야생화가 다양한 곳, 능선 정상에 방목해 놓은 말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두 개의 원형분화구의 모습은 이 오름만의 또 다른 특별함이다. 오름 주변에 커다란 못이 2개가 있다. 어쩌면 오름의 이름을 대변하는 단서일 수도 있는 중요한 사실이다.

평범함에 감춰진 특별함, 엄청난 양의 물을 머금은 오름

조근대비악은 중산간 지역에 나지막하게 자리 잡고 있다. 지나가는 길목,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쉽게 접근하지 못한다. 이름이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이곳을 기록해 놓은 사람들도 많지 않아서 더욱 그렇다. 어쩌면 독특함이 없어 보여 더욱 가까이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초입부터 억새와 잡목들이 길을 막는다. 조금 더 안으로 향하여 본들 쳐놓은 철조망으로 들어서기가 망설여 진다. 하지만 처음 조우했던 오름 속의 모습은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히 남아 있다.


▲ 오름 중허리에 있는 묘와 산담(사진=김미경)

10월의 늦은 어느 날, 혼자 발걸음을 떼기가 쉽지 않았다. 오르미들이 발길로 만들어 놓은 탐방로 비탈길, 보랏빛 꽃향유가 정상으로 올라갈 때까지 꽃길을 만들어 준다. 오름 중허리에서 마주한 어느 집의 조상 묘는 거친 숨을 헐떡이는 이에게 잠시 쉼을 허락한다. 바람은 금세 젖은 옷자락을 식혀주었고 저 멀리 수평선까지 펼쳐지는 푸른 초원의 모습은 답답했던 가슴뿐만 아니라 시야까지 뻥 뚫어 준다. 목초를 베어 만든 원기둥 모양의 건초더미인 마시멜로(#곤포사일리지) 모습은 한 폭의 그림처럼 초원에 펼쳐진다. 조선의 국영목장 중 6소장이었던 이 넓은 대지, 여전히 소와 말이 풀을 뜯고 있으니 그 모습 또한 한가롭고 정겹기까지 하다.


▲이 오름은 가을에 꽃잔치가 펼쳐졌던 곳이었다. 왼쪽 위 : 금창초, 오른쪽 위 : 등심붓꽃외, 오른쪽 아래 : 자주쓴풀과 흰꽃향유, 왼쪽 아래 : 솜방망이(사진=김미경)   

기억 속의 꽃들은 다 어디 갔을까?

달라졌다. 이렇게 사람들이 다니지 않았나? 잡목들이 우거져 길을 찾기가 힘들었다. 어수선한 식생들은 키 낮은 야생화들에게 치명적인 어둠을 만들었다. 중허리의 산(묘)은 이장을 해서 주인이 없었다. 정상을 올라보니 더욱 놀란 건 키 높이까지 자란 억새군락이다. 오름 능선을 차지하여 가을의 야생화 모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황망하다.

사람의 흔적이 사라진 이곳, 다양한 생태계를 이뤘던 모습이 사라졌다. 순간 생각이란 걸 잃게 된다. 인간의 의도가 너무 개입이 되어 사라지는 자연생태계와 또 다른 형태이다. 오름이 아름다워 보전하고 싶은 마음은 어쩌면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이루어질 때 생기는 게 아닐까 싶다.


▲ 조근대비악 정상에 서면 제주도 서부지역의 오름과 너른 들판을 한눈에 볼 수 있다. 왼쪽 위 : 오름 서쪽 전경, 오른쪽 위 : 2019년 촬영한 정상부, 오른쪽 아래 :  2024년 정상부 모습, 왼쪽 아래 : 2019년 정상부(사진=김미경) 

서부지역의 정수를 다 보여주는 곳이다. 가까운 원물오름, 감낭오름, 당오름, 정물오름, 금오름, 이달이오름, 새별오름 등 많은 오름과 최남단의 마라도까지, 곶자왈을 만들어 낸 도너리오름 덕분에 광활한 대 자연을 만끽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족’ 또는 ‘촉’, 조근의 어원은 물이 있어 설득력이 강해진다. 조근대비악이 있으면 큰 대비악은 어디에? 대부분 이런 물음을 하게 된다. 아무리 찾아도 큰대비악이라고 불릴 만한 오름은 없다. 그럼, 대비는 도대체 어떤 뜻일까? 유추해내기가 어렵다.

조근이라는 말은 작다라는 말이다. 1632년에 간행한 중간 두시언해에는 ‘작은’의 뜻으로 ‘효근’, ‘쇼근’ 계열이라고 한다. 서귀포 ‘서건도는 ’작은섬‘이라는 의미의 ‘쇼근섬’ 이라고, 오늘날 ‘썩은섬’이라고 부르는 지명에서 나타난다. 이밖에도 많은 지명들의 예를 들어 어느 학자는 밝히고 있다.

만약 작다고 표현되었으면 비교 대상인 다른 오름이 있어야 할 텐데 그럴만한 곳이 없다. 어쩌면 고어에 따른 ‘젖다’라는 뜻의 ‘족’또는 ‘촉’으로 쓰였을 것이라는 추측이 더 설득력이 있다. 우리말에 ‘축축하다’, ‘촉촉하다’, ‘질다’라는 기원이라고 하니 더욱 들어맞는다. ‘대비’ 또한 ‘젖다’, ‘담그다’라는 뜻의 고어라고 밝힌다.


▲ 오름 서쪽에 맑고 너른 호수가 있다. 호수의 맑은 물이 푸른 하늘과 오름을 모두 담았다.(사진=김미경)

오름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순간 반짝이는 수면이 보였다. 호수다. 오름 자락 200여 미터 서쪽이었다. 뭐지? 제주도 중산간 오름에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호수가 눈앞에 들어왔다. 서부 지역의 넓은 초원 위에 습지가 형성된 곳을 몇몇 확인한 바 있지만 이렇게 커다란 호수는 처음이다. 그 어떤 자료에서도 이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몇 차례 조사차 이곳을 찾았지만. 궁금증은 더 커졌다. 이 호수가 어떻게 만들어 졌을까? 앞으로 이곳의 지질연구가 필요할 듯하다.

어쩌면 사람들은 호수 너머로 바라보는 산을 표현했을 지도 모른다. 오름 중허리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습지의 모습, 광활하고 메마른 초원에 생명의 젖줄을 선사해주는 것처럼 오름 이름 어원의 새로운 여명을 줄지도 모르겠다.

오름을 삼킨 호수, 수면 위에 투영된 맑고 깨끗한 ‘조근대비악’

수면 위에 비춰지는 오름의 반영, 깨끗하다. 어디선가 흘러나오는 물을 연상하기에 충분하다. 습지의 깊이는 알 수 없지만 오름의 넓이를 한 아름 안고 있는 모습으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몇 년을 살았을까, 커다란 머귀나무 정령은 물을 지켜내기라도 하듯이 주변을 지키고 있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는 없지만 생명체들의 생명수 같은 역할을 충분히 했을 것이다. 이곳은 인간의 간섭이 없어질 때 지켜지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조근대비악
서귀포시 안덕면 광평리 산59
표고 541.2미터 자체높이 71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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