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논’이라지만 진짜 돈벌이는 벼농사 아닌 미나리농사
[물이 빚은 도시 서귀포] 하논분화구 몰망수
늦더위가 기승을 부린 뒤에 겨우 가을이 찾아왔다. 가을이 무르익을 무렵이면, 서귀포 하논분화구는 벼가 노랗게 익어 장관을 이룬다. 제주도에서 드물게 논에 벼가 자라는 곳이니, 파란 하늘 아래 펼쳐진 황금물결을 감상하는 건, 이 섬사람에게 설레는 일이다.
대자연은 일찍이 물과 불을 빚아 제주땅을 만들었고 서귀포 해안 가까운 곳에 이처럼 거대한 분화구를 지었다. 오랜 세월에 거치는 동안 이 거대한 분화구는 바닥이 판판한 습지로 변했는데, 사람들은 그 습지를 개척해 벼농사를 지었다. 하논은 현재 제주도에서 논농사가 이루어지는 곳으로는 거의 유일하다.
'하논'은 '하다(많다 혹은 크다)'라는 고어와 '논'의 합성어로, '큰 논'을 뜻한다. 1899년에 정의현의 토지를 조사한 문헌에서 ‘호근대답(好近大沓)’이라는 명칭이 나오는데, 대답(大沓)은 '하논'의 한자식 표기다.
제주에는 물영아리오름, 물장오리오름, 물찻오름 등 분화구 안에 물이 고여 습지를 이루는 화산체들이 여럿 있다. 하논분화구도 마찬가지다. 하논의 옛 이름으로 큰못(大池) 혹은 조연(藻淵)이 있었던 것을 보면, 이 분화구도 안에 물이 고인 천연습지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하논분화구는 다른 분화구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바닥이 판판했다. 게다가 군데군데에서 끊임없이 지하수가 솟아났다. 이 분화구 중에서도 가장 많은 물이 솟는 샘은 분화구의 동북부에 있는데, 주민들은 이 샘을 '몰망수'라고 부른다.
10월 13일 오후, 울렁이는 황금물결을 감상하기 위해 하논분화구를 찾았다. 아뿔싸, 벼는 수확이 끝났고, 논은 바닥을 드러내 있었다. 대신 미나리 밭에서 농부가 수확에 한창이어서 농부와 이야기를 나눴다.
미라리 농사를 짓는 농부는 이용순·이재순 씨 부부다. 이름만 들으면 남매 사이 같은데, 부부라고 했다. 강원도 영월이 고향인데, 제주에 들어와서 11년째 하논분화구에서 미나리 농사를 짓고 있다. 700평 규모로 농사를 짓는데, 모터를 이용해 미나리 밭에 물을 끌어들인다. 미나리밭 위에는 새들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물을 둘렀다.
여름 이후 채소 가격이 폭등한 영향으로 미나리도 시세가 좋다. 최근 미니라 1킬로그램 당 1만5000원 정도이니, 부부는 미나리가 고맙기 짝이 없다. 이 모든 게 분화구와 몰망수가 있어서 누리는 기쁨이다.
몰망수에서 계속 물이 나오는 건 아니라고 한다. 가물면 물이 나오지 않아 미나리농사를 지을 수 없을 때도 있다고 했다.
이재순 씨는 “물이 마를 때가 있었다. 2년 정도 그런 경험을 했는데, 올해도 봄에 물이 말랐다가 6월 말에 비가 많이 내리니까 샘에서 물이 터지더라”라며 “물이 마르면 미나리농사를 지을 수 없어서, 다른 지역으로 가서 농사를 지었다.”라고 말했다.
그물을 두른 것은 오리가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재순 씨는 “아침에 밭에 와보면 몰망수 주변에 오리가 50마리 정도 모여 있다.”라며 “그냥 나누면 오리가 미나리를 먹어치우기 때문에 그물로 막아야 한다.”라고 말했다.
제주대학교 지구해양과학과 윤성효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 하논은 직경이 1.0~1.2 km에 달하는 제주도 최대 규모의 화산 분화구이다. 응회암화구 테두리와 그 내부에 최대 약 15미터 두께의 습지 퇴적층이 형성되어 있다. 분화구 중심부가 주변 지표면보다 평균 30미터 정도 낮아,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마르(maar)형 화산체로 분류된다.
하논 화산체는 지금으로부터 약 3만5000년 전에 수성분출에 의해 형성됐고, 분화구 안에 원래 호수나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500여 년 전에 주민들이 분화구 테두리 일부를 터서 습지를 논으로 개간해 벼농사를 시작했다. 1900년대 후반에는 감귤과수원, 사찰, 주택, 도로 등 인위적 시설물이 분화구 안팎에 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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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