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돼지들판에서 먹은 고기국밥, 고단한 하루를 위로했다

[동네 맛집 ⑨] 토평동 ‘엄마식당’


‘머피의 법칙’ 같은 것에 걸린 날이 있다. 몇 가지 일을 해결하는데, 순조롭게 되지 않고 제각기 타이밍도 맞지 않는 날이다. 23일이 그랬다. 국세청 홈텍스 로그인은 잘 안되고 은행에 가면 예상외로 대기시간이 길어졌다. 일을 마치고 점심을 먹으려는데, 가는 곳 마다 문이 닫히거나 브레이크 타임이다. 비까지 부슬부슬 내려 갑자기 처량해졌다. 가까스로 토평동에서 겨우 밥집을 찾아 들어갔다.


▲ 고기국밥. 국물을 많이 걷어내고 배추를 넣어 단백하고 시원한 맛이 난다.(사진=장태욱)

일제강점기 토평동에는 동경제국대학 생약연구소 부설 제주도시험장이 있었다. 석주명은 이곳에 부임해 제주도에 대해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는 ‘제주도의 생명조사서’라는 책에서 ‘토평’의 옛 이름은 ‘저평(猪坪)’이라고 했다. 마을 이름에 돼지 저(猪)가 들어가는데, 옛날에는 마을 이름에 짐승이 들어가는 건 일반적이었다.

들어간 음식점은 토평 마을회간 앞에 있는 ‘엄마식당’이다. 가까운 곳에 교육지원청과 서귀포농협지소가 있어서 지나는 사람이 많은 곳인데, 음식점은 아담하다.

점심과 저녁 사이 어중간한 시간이라, 손님이 우리 밖에는 없었다. 국밥과 찌개, 국수를 파는데 모두 9000원이다. 돼지국밥과 순대국밥 한 그릇씩 주문했다.


▲ 순대국밥. 제주도 시기 순대와 내장을 넣어 장터의 맛이 올라온다.(사진=장태욱)

김치와 깍두기, 감자채볶음, 콩자반이 기본 반찬으로 올라오고, 양파와 고추, 된장이 따라 나온다. 식당 분위기도, 반찬도 모두 깔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찬이 나오고 5분쯤 뒤에 국밥이 나왔다. 고기국밥은 우선 보이는 모양이 남다르다. 국물이 단백하고 깔끔한데, 느끼한 맛이 전혀 없다. 뼈를 고아 국물 맛을 냈는데, 거기에 겨울 배추를 듬뿍 넣어서 시원한 데다 단맛도 느껴진다. 고기는 돼지 머릿고기를 잘게 썰어 넣었다.

주인장은 “돼지 뼈룰 우려낼 때 기름기를 걷어내 느끼한 맛을 없앴다”라며 “그래서 베지근한 맛보다 단백하고 시원한 맛이 날 거다”라고 말했다.

순대국밥에는 제주도식 순대를 사용했다. 가끔 국밥에 육지 공장에서 생산한 값싼 순대를 썰어 넣는 집도 있는데, 그러면 기대했던 순대국밥 맛을 낼 수 없다. 이 집은 제주식 순대에 돼지 간, 허파 등을 썰어 넣었다. 비슷하게 돼지 뼈로 국물 맛을 냈는데, 순대와 부산물이 들어있어 시골장터의 맛이 올라온다.

오래된 식당인데, 재작년에 주인장이 바뀌었다고 한다. 지금 주인장은 서귀포 출신인데, 다른 곳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이 식당을 맡아 운영하게 됐다고 한다.

맵고 짠 음식보다 단백하고 시원한 맛을 좋아하는 필자에겐 딱 좋은 식당이다. 그런데 자극적이거나 기름진 음식을 선호하는 손님들도 있어 호불호가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옛 돼지들판에서 먹은 돼지국밥인데, ‘머피의 법칙’에 걸려 상했던 속이 시원하게 풀렸다. 사는 게 늘 순조롭기만 하겠나? 이런 저런 일들 겪으면서도 국밥 한 그릇으로 속을 녹이며 살면 되는 거다.


위치는 서귀포시 토평로 59. 국수·찌개·국밥 모두 9,000원. 제육볶음 1인분 1만2000원, 삼겹살은 1만3,000원, 모듬순대 한 접시 2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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