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잔치에 사우나·미용실까지.. 미깡 따고 언제 그걸??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⑯]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는 삼촌들

도시 생활을 정리하고 제주에 왔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핸드폰에 있는 모든 알람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침에 일어나는 시간뿐 아니라 심지어 샤워하러 욕실에 들어가는 시간, 샤워하고 욕실에서 나와야 하는 시간, 집을 나서 엘리베이터를 타는 시간까지도 핸드폰 속 알람이 끊임없이 울렸답니다.


▲ 귤 따러 갔던 집 주인 삼촌이 걸어놓은 달력과 칠판(사진=키라 이금영)

말 그대로 시간의 노예, 시간 거지로 살아왔지요. 그렇게 살아왔던 사람이 제주에 와서 제일 먼저 한 일이 알람을 끄는 일이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더 이상 시간의 노예로 살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서.

운이 좋게도 본격적인 제주 생활자가 되기 전, 미리 제주 생활자 예행연습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지요. 제가 지켜야 할 집의 언니들이 유럽 여행을 떠나기 한 달 전, 제게 제주살이의 기본적인 팁을 주고 조언을 해주었답니다. 그 조언 중 하나가 바로, 시간 관리였습니다.

제주에서는 시간 관리를 하지 않으면 뭐 특별히 한 것도 없이 하루가 그냥 휙~ 지나가 버린다는 것입니다.(아, 이건 제주토박이 분들은 이해 못 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에게 프랭클린 플래너를 추천해주셨지요. 하루일과 중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체크해서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다이어리였어요. 처음 제주에 왔을 때 ‘시간 노예에서 벗어나 해방이다’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1주일 정도 지나니, 하는 일 없이 시간이 지나가버려 시간이 아깝더라고요. 그래서 언니의 조언대로 프랭클린 플래너를 사용하기 시작했답니다. 물론 서울에서처럼 온갖 알람을 설정해 살지는 않았지만, 대신 시간을 어떻게 써야하는지 배우기 시작했다랄까요?


▲ 귤 따러 온 삼촌들(사진=키라 이금영)

제주에서 책방을 하다 보니, 육지에서 오신 많은 분들이 제게 하는 말들이 있습니다.
“제주에 살아서 좋겠어요, 저도 이렇게 느리게 살아보고 싶은데.” 또는 “제주에서 여유롭게 사는 게 부럽습니다.”라고. 육지 사람들 눈에는 제가 우아한 백조 책방사장처럼 보였을까요? 제주에 사는 건 좋은 게 맞는데, 제가 느리게 사는 것도 여유부리며 사는 건 아닌데 말이에요. 저는 지금 물밑으로 갈퀴질을 하느라 정신이 없는데 말이죠. 이럴 때 제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제주의 삶은 느리게 사는 게 아니고, 여유롭게 사는 것도 아니고요. 삶의 속도를 제가 조절하면서 사는 것이랍니다.”라고 대답을 합니다.


▲ 마을 축제에서 떡을 만드는 삼촌들(사진=장태욱)

▲ 축제 무대에서 해녀공연을 펼치는 삼촌들(사진=장태욱)

물론 이런 삶의 자세는 당연히 제주 사람들에게 배웠지요. 삼촌들하고 이른 아침부터 오후 5시까지 귤 따고 집으로 돌아가면 그다음부터는 아무것도 하기 싫은 거예요. 몸이 돌하르방이 되어버린 듯 꼼짝하기 싫고요, 어서 씻고 쉬어야지 하는 생각뿐이랍니다. 그런데 다음날 귤 따러 가면 삼촌들은 어젯밤 동네 지인들이랑 사우나 간 이야기, 잔치 먹으러 간 이야기, 영장난 집에 간 이야기, 모임 간 이야기들로 가득입니다. 저는 그때마다 삼촌들에게 “아니, 힘들지도 않아요? 하루 종일 일하고 거기 갈 시간이 되요?” 라고 묻습니다. 정말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주변인들과 어울리며 살아갑니다. 그렇다고 365일 이렇게 살지는 않습니다. 비가 오는 날엔 병원도 가고, 미용실에 파마도 하러가고, 일하느라 못했던 개인적인 일들도 하십니다. 그리고 가끔은 “실퍼서 안 했어.” “실퍼서 안 갔어.” 라고 게으름도 피우십니다.

쉬는 법을 모르고, 시간의 노예로 살아왔던 도시생활자가 제주에 살면서 삼촌들에게 배운 건 바로 삶의 속도를 조절하며 사는 주체적인 삶이었습니다. 항상 바쁘게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느리게 살아야만 하는 것도 아닌 거지요. 때로는 바쁘게 때로는 느리게, 시간의 속도를 조절하며 사는 그들의 삶 속에서 제가 배운 삶입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 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은 책<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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