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성의 오이 한 개도 지켜주겠다던 태조 이성계
[주말엔 꽃] 오이꽃
과수원 어린 묘목 사이에 오이꽃이 노랗게 피었다. 벌써 몇 차례나 열매를 수확했는데, 지치지도 않고 계속 꽃을 피운다. 오이는 여름 뜨거운 열기를 허투루 사용하지 않고, 오롯이 줄기를 키우고 꽃을 피워 열매를 맺는 일에만 쓴다. 생명력으로나 쓰임으로나 여름에는 오이만 한 게 없다.

어린 귤나무를 심은 자리 틈에 아내가 수박과 오이 모종을 사서 심었다. 어린 나무와 수박과 오이에 날마다 물을 줬더니, 모두 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특히, 뿌리로 물을 삼키고 잎으로 열기를 머금은 오이넝쿨은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일에 부지런도 하다. 특히 올해는 열매를 많이도 맺거니와 열매 자라는 속도가 남달라 키우는 재미가 있다.
한 달 넘게 오이꽃과 오이 열매가 주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열매는 냉국과 장아찌로 밥상에 오르는데, 여름 입맛 돋우는데 오이만한 것도 없다. 노란 꽃은 앙증맞은데 맑은 날이면 벌을 부른다. 작은 오이 모종이 자라서 큰 넝쿨이 됐는데, 그 때문에 주변 풍경이 바뀌었다.
오이는 박과에 속하는 관속식물로, 한해살이 작물이다. 인도 서북부와 네팔 등지가 원산지라고 한다. 인류가 재배한 지 3000년도 더 되었다니 사람과는 매우 친근한 작물이다. 씨만 심으면 번식이 잘 되고 기르기도 편한 식물이라, 이 쉬운 작물을 인간이 그냥 놔둘 리 없었다.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즈음에 중국을 통해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오이가 처음 들어올 때는 절임 반찬을 만드는 재료로 왔을 것이다.

3000여 년 전 공자가 썼다는 『시경(詩經)』에는 절임 음식으로 ‘저(菹)’라는 이름이 나온다. 이에 대해 송나라 주희는 주석으로 ‘오이가 자라면 깎아서 절여 저를 만들어 황조(황제를 지낸 선조)께 올리니, 사시(四時)의 다른 물건을 귀히 여기고 효자의 마을을 순히 한 것이다.’로 풀이했다. 제철 체소인 오리로 절임을 만들어 옛 황제에게 바치는 것이 효를 실천하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과거 중국황실이 오이를 중요한 제철채소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오이는 우리나라 역사에도 자주 등장한다. 태조실록에는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단행하고 고려도성에 도착했을 때, 군사들에게 "너희들이 만약 승여(乘輿) 를 범한다면 나는 너희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이며, 백성의 오이 한 개만 빼앗아도 또한 마땅히 죄의 경중에 따라 처벌하겠다."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승여란 당시 고려 국왕인 우왕을 칭한다. 이성계가 우왕의 목숨을 지키려 했던 점과, 고려 백성의 사소한 재산까지도 함부로 대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였다는 대목이다. 역사란 강자의 기록이어서 이성계가 실제로 그렇게 얘기했을 지는 의문이다. 다만, 실록에 ‘백성의 오이’ 운운한 대목이 나오는 걸 보면 당시, 고려 백성들이 집집이 오이를 키우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세종실록에는 천신(薦新)에 대해 ‘2월에는 얼음, 3월에는 고사리, 4월에는 송어, 5월에는 보리·밀·앵도·죽순·오이·살구, 6월에는 가지·동아·능금, 7월에는 기장·피·조, 8월에는 벼·연어·밤, 9월에는 기러기·대추·배, 10월에는 감·귤·감자, 11월에는 천아, 12월에는 물고기·토끼이다.’라고 했다.
천신은 제철 농산물을 먼저 신위에 바치는 일을 의미한다. 실록은 음력 5월에는 보리와 밀, 앵두, 살구와 더불어 오이를 으뜸으로 기록하고 있다.

과거 오이는 절임음식을 만들 때 주로 사용했는데, 지금은 절임은 물론이고 샐러드나 냉국을 만들 때 생으로 사용된다. 피부 가꾸는 일이 중요해지면서, 얼굴에 열독을 내리는 미용 재료로도 쓰인다.
오이 줄기는 덩굴지면서 뻗어 자라는데, 덩굴손이 있어서 다른 물체에 자신의 몸을 고정한다. 잎은 어긋나며 하트 모양으로 얕게 갈라진다. 초여름부터 꽃이 피는데 암꽃과 수꽃이 한 포기에서 나는데 따로 있다. 수꽃은 1개 또는 여러 개가 잎겨드랑이에서 달리며, 암꽃은 1~2개씩 달린다. 꽃부리는 노란색인데, 끝은 5갈래로 갈라진다. 수꽃은 수술만 3개 있고, 암꽃은 암술대가 3개인데, 암술대의 끝이 2갈래로 갈라진다.
오이는 재배 역사가 오랜 작물이어서 품종도 다양하다. 특히, 재배 지역, 수확시기 등에 따라 품종이 다양해 농가에서는 선택지가 많다. 남부지방에서는 취청오이나 가시오이가, 중부지방에서는 다다기오이가 주로 재배된다. 단단하기로는 가시오이가 단단하고, 수분이 많기는 다다기오이가 최고다. 다만, 소비자 입장에서 오이를 고를 때는 품종을 막론하고 머리에서 끝부분까지 굵기가 일정한 게 좋다.
23일이 처처였다는데 처서가 지나도 더위가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이렇게 더우면 오이는 서늘해질 때까지 계속 제 생명력을 과시할 것이다. 오이가 주는 풍요를 충분히 누렸으니, 이제 그만 시들해져도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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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태욱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