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도읍 살린 샘은 마르고 계절 잊은 산철쭉만 신났다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⑧]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8) 성불오름

 은빛 물결 파도치는 가을의 끝자락에서

번영로 대천동 사거리를 지나 달리면서 보이는 오름의 모습은 시작과 끝이 달라 보인다. 둥근 모습에서 두 개의 봉우리로 나눠진 모습, 뾰족한 모습으로 바뀐다. 한라산의 모습이 동서남북 달라 자기가 사는 곳에서 보이는 곳이 가장 멋지다고 자랑하는 데, 이 오름 주변에서 생활했던 옛사람들은 성불오름의 어느 쪽 모습을 보고 중요시했을까 생각해 본다. 정의현에서 북쪽으로 15리 정도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읍사람들은 성불오름의 샘이 유일한 급수원이었다고 하니 생활이 얼마나 고단했을까. 어떻게 보면 성불오름의 이름이 이곳 샘하고 밀접하게 연결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며 찾았다.


▲ 성불오름(사진=김미경)
▲ 성불오름 가는 길에 만난 말이 풀을 뜯는 장면(사진=김미경)

지는 해를 받아 은빛 물결 파도치는 억새의 모습은 가을의 끝자락을 알려주고 있다. 초지의 푸릇한 먹잇감들이 모자란 지 철조망 넘어 억새 자락을 뜯어 먹고 있는 말들의 모습 또한 넘어가는 계절을 붙잡고 있지만 성불오름 전체가 침엽수림으로 가득 차 겨울이 오는지는 아직 피부로 느껴지지 않는다. 하지만 가을을 지나가는 길목에서는 확연하게 그들만의 색깔로 구분되어 진다. 그중 단연 일색인 것은 편백이다.

  싸락눈 내리듯이 떨어지는 편백 비늘잎의 낙엽 소리를 들으며

억새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삼나무와 편백의 울창한 들머리를 만나게 된다. 골짜기 사이를 두고 두 갈래의 갈림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오름의 느낌이 달라지지만 어떤 선택이든 그건 오름 나그네의 몫이니 주저 말고 발길 먼저 옮겨지는 대로 오르면 된다.


▲ 외쪽 위 : 편백나무 군락/ 왼쪽 아래 : 삼나무 차지가 된 무덤 자리/ 오른쪽 아래 : 죽은 편백나무 가지에서 버섯이 자라는 모습(사진=김미경) 


▲ 겨울의 초입인데, 계절을 잊은 산철쭉이 나그네를 반겼다.(사진=김미경)

▲ 성불오름 골짜기에 자생하는 멸가치(사진=김미경)

사라락 사라락 소리가 나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싸락눈 내리듯이 떨어지는 편백 비늘잎들의 낙엽 소리, 가만히 눈을 감고 소리에 집중해 본다. 바람과 함께 여기저기 부딪히면 내는 소리들은 그 어떤 날보다 특별하다. 그 아래 풀고사리가 군락을 이루어 겨울이 오는 길목을 지키고 나무들은 가지를 스스로 떨어트리며 겨울 준비를 하는 중이다. 정상 부근까지 올라가는 탐방로에는 편백과 삼나무 그리고 소나무가 번갈아 가며 나타난다. 살짝 하늘 뚫린 곳에서는 가막살나무, 예덕나무, 팽나무, 비목나무 등 낙엽활엽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제주오름에 무덤이 없는 곳이 없다. 햇볕이 잘 드는 양지바른 곳에 돌담을 두른 무덤들이 모여 있는 것은 어쩌면 제주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오름 중허리, 산담의 크기나 모양을 보아하니 전대에 부귀영화를 누렸을 법한 모습인데 삼나무가 무덤 위로 터를 잡고 자라는 모습이 보인다. 어찌 이곳에서 이런 험한 모습으로 남아있을까. 씁쓸한 마음과 함께 찬 기운이 옷자락 사이로 스치며 들어온다.

 그대는 아는가, 그저 송이로만 만들어진 단순한 오름이 아님을?

이곳도 철모르는 녀석이 있다. 오름 정상에 한겨울에도 피어 있었던 산철쭉이 11월의 막바지에도 피었다. 그리고 사스레피나무가 군락을 이뤄 그곳의 토양이 흘러내리지 않게 단단히 붙들고 있는데, 그 속에 큰 절벽이 숨어있다. 자잘한 송이 같은 색깔을 띠지만, 엄청난 크기의 바위다. 송이보다 점성이 훨씬 높은 상태로 쇄설물이 분출하다 굳어진 것이라 한다. 이런 오름은 뭐라고 불러야할 지 아직은 제시된 바 없으니 설명이 복잡해진다.


▲ 과거 정의현 백성의 젖줄이었는데, 지금은 메말라 물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왼쪽 : 성불천 가는 골짜기/ 가운데 : 1월의 성불천/ 오른쪽 : 11월의 성불천(사진=김미경)

 이 작은 샘이 성불천(成佛泉) 혹은 성불암천(成佛庵泉)

웃자란 나무들 때문에 조망은 그다지 좋지 못하지만, 앉아 쉴 수 있는 의자는 놓여 있다. 남쪽으로는 따라비오름, 동쪽으로는 개오름과 비치미오름, 영주산 등 동쪽 오름들의 봉긋한 모습들이 제법 드러나 보인다.

윤노리나무 군락과 산수국의 군락 사잇길을 따라 중간쯤 내려오니 왼쪽으로 향하는 길이 나타난다. 전에 왔을 때는 이 길이 꽤 선명하고 넓었다는 느낌이 들었었는데 오늘따라 수풀이 우거져 보인다. 나무다리를 건너니 드디어 샘에 다다랐다. 이 작은 샘이 성불천(成佛泉) 혹은 성불암천(成佛庵泉)이라는 바로 그 샘이다. 이 이름은 17세기에 지어진 탐라지(耽羅誌)와 탐라록(耽羅錄)에도 기록되어 있다.

 성불오름, 과연 이 이름에 담긴 뜻은 무엇일까.

‘옛날에 어떤 스님이 움막을 짓고 기도하다가 성불했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성불오름 주변에 성불암이란 암자가 있었다고 한다.’

여러 해설서에 나오듯이 이런 뜻일까? 불교 색 짙은 이 이름은 과연 불교가 성행한 이후에 지어졌나?

최근 여러 증거들을 분석하여 제시한 새로운 결과에 따르면, 고대어로 샘을 뜻하는 ‘설’과 역시 샘을 뜻하는 ‘부리’의 결합인 ‘설부리올(오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주변일대에 유일한 급수원인 샘이 있어 멀리서도 찾아온 성불오름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소중한 존재이기에 불려졌을 충분한 의미를 갖는다.

누군가가 가치 있는 존재로 바라봐 주고 대해 줄 때 그 존재는 가치가 있게 된다는 믿음에서 움직인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진다.

성불오름
제주시 구좌읍 송당리 산 226
표고 361.7미터 자체높이 97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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