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 손끝 타고 ‘이슬땅’ 위에 맺힌 결실, 신들의 바다 앞에 펼쳤다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 ⑩ 문화도시 서귀포 노지문화전시 ‘이슬땅’ 개막

휴먼라이브러리 영상 아카이브와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 발굴, 기후예술 프로젝트는 문화도시 서귀포가 지난 5년간 추진한 사업의 정수다. 척박한 땅에서 굴곡진 시간을 견뎌온 사람들, 그리고 그들이 계승하고 간직한 문화와 기억, 기후위기 속에서 문화이 지속가능성에 대한 성찰이 이들 사업에 오롯이 녹아있다. 바다와 한라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옛 전경초소에서 사업의 결실을 공개하는 전시가 마련됐다.

서귀포 노지문화전시 《이슬땅: 모두가 이슬이고 모두가 땅이다》가 11월 9일 대포마을 옛 전경초소에서 개막했다. 12월 8일까지 전시가 이어질 계획이다.

 자연과 인간이 연대하는 공간 이슬땅

‘서귀포에는 노지문화가 있습니다.
벽도 지붕도 없어서 그대로 날을 지내다 보면
이슬이 맺히고야마는 땅을 노지(露地)라고 합니다.

노지문화는 박물관 한 편에 보관된 유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과거에 만들어져 이미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만들어지고 있으며,
계속 진화하는 생명력을 가진 것입니다.’


▲ 미래문화자산 전시실에서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관람하는 장면(사진=장태욱)

전시 안내에 적힌 내용인데, 주제가 ‘이슬땅’인 이유를 알 수 있다. 노지문화는 자연 속에서 노동하고 연대하며 일궈낸 고유한 문화다. 이건 귀족도 사회 엘리트의 것도 아닌 민초의 것, 공동체의 것이다. 세련되게 가공돼서 박물관에 전시된 것도 아니다. 오직 공동체의 기억에 저장되고 자연에 대응하고 구성원이 서로 관계하는 과정에서 발현되는 것이다.

《이슬땅: 모두가 이슬이고 모두가 땅이다》는 ‘노지문화’를 주제로 그간의 문화도시 활동을 공유하는 전시이다. 전시공간은 대포마을 구 전경초소, 바다에서 파도소리가 들리고, 한라산이 훤히 내다보이는 곳이다. 전시장 입구에는 ‘128전경대 3소대’라 적힌 과거의 현판과 ‘노지문화답다’라는 현대의 간판이 세워져 있다. 과거 방어시설이었던 곳이 문화전시장으로 탈바꿈한 사실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 서귀포 노지문화전시 《이슬땅: 모두가 이슬이고 모두가 땅이다》가 11월 9일 대포마을 옛 전경초소에서 개막했다. 개막식 테이프 커팅(사진=장태욱)

전시장 앞뜰에는 김순이 시인의 ‘대포해안에서’가 새겨진 시비가 있다. ‘이곳에 가끔 신들이 찾아온다’라고 시작하는 첫 대목이 강렬하다. 시인은 이곳을 ‘물어뜯으며 달려드는 바다를/ 성난 발길로 걷어차는/ 어리숙한 신들의 대포해안’ 이라고 했다. 이슬과 땅, 바다 모두가 선명하게 자신을 뜨러내는 대포해안 전경초소. 날것 그대로 서귀포 자연을 느낄 수 있는 곳에 마련된 전시여서 더욱 운치가 있다.

휴먼라이브러리 영상과 서귀포시민이 발굴한 미래문화자산, 기후예술 작품이 전시됐다. 그리고 그간의 활동을 담은 사진과 문화도시 활동을 통해 출간한 출판물도 소개했다. 전시를 둘러본 시민과 여행객이 느낌을 적을 수 있도록 디지털 방명록 ‘노지문화를 담다’ 방도 마련했다.


 휴먼라이브러리 전시

‘휴먼라이브러리’는 한평생 온몸으로 노지문화를 일궈온 마을삼춘의 삶의 이야기를 기록한 영상이다.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는 2021년부터 현재까지 총 17편(쇠테우리, 돌챙이, 도감, 우장, 고망낚시, 구덕, 감귤영농 1세대 등)의 영상을 아카이빙했다.

휴머라이브 영상은 ▲땅에서 자라나다 ▲바다에서 흘러오다 ▲돌에서 캐어내다 ▲풀과 정성을 엮다 ▲시간을 쌓아올리다 등 5개 주제로 나뉘어 전시됐다. ‘땅에서 자라나다’는 고윤자(감귤 1세대), 고기정(쇠테우리), 김례(밭볼리는 소리) 농경과 목축 문화를 간직한 어르신을 엮었고, ‘바다에서 흘러오다’는 현순신(90대 해녀), 고순신(테왁 망사리 공예), 정성필(고망낚시) 등 해양문화를 간직한 어르신을 엮었다. 그리고 ‘돌에서 캐어내다’는 조이전·고정팔(비석장과 각자장), 김상홍·변산일(돌챙이), 송현군(불미대장) 등 돌을 다듬과 흙을 구워 옹기를 만들던 어르신을 엮었고, ‘풀과 정성을 엮다’는 김유헌(멍석 공예), 오복인(굴중이), 강범식(구덕) 등 생활도구를 만들던 공예가들을 엮었다. 그리고 ‘시간을 쌓아올리다’는 강희수(도감), 윤세민(서귀진성터 구슬), 오용부(심방), 강승옥(가시리 소꼽지당 단골) 등 문화공간을 기억하고 지키는 어르신들을 엮었다.


▲ 휴먼라이브러리 전시장(사진=장태욱)

주제별 모니터에선 휴먼라이브러리 영상이 연속을 상영되고, 모니터 주변에는 관객이 이해할 수 있도록 짧은 주석을 붙였고, 주변 벽면에는 어르신들이 입었던 옷과 사용했던 도구도 전시했다.

 시민이 건져낸 발아래 보물, 미래문화자산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는 마을의 유·무형 노지문화자원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콘텐츠화하여 미래세대에게 전해줄 자산으로 아카이브 시스템을 구축해오고 있다. ‘서귀포 미래문화자산’은 국가·제주특별자치도(행정시 포함)의 문화재·기념물·향토유산 등으로 등록되지 않았지만, 미래 세대에게 전달할 가치가 있는 문화적 자산을 말한다. 시민 제안을 바탕으로 각 전문가로 구성된 거버넌스 ‘미래문화자산 추진단’을 통해 총 27건 69개 최종 선정되었다.


현재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는 시민들이 추천한 미래문화자산을 105개 마을별 약 2건씩 총 600여개를 예비 목록화 하여 보유하고 있다.

전시장 한켠에 남방석과 애기구덕, 물허벅, 막게 등 미래문화산이 전시됐다. 미래문화자산 발굴단이 집과 마을을 뒤져가며 찾아내고, 추진단의 심의를 거쳐 결정된 것들이다. 젊은 여행객들이 뭣에 쓰는 물건인지 신기한 표정으로 쳐다본다.

서귀포의 문화자산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도록 노지문화자산 스팟도 확인할 수 있도록 했다.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자신이 원하는 곳에 노지문화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한 것인데,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도 위치와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기후위기의 최전선 서귀포시와 기후예술 프로젝트

이번 전시에도 기후예술 작품이 전시됐다. 기후위기의 최전선에서 소멸하는 자연을 마주하며 그 대응 방안을 함께 모색하자는 취지다.

1층 입구 가까운 곳에 박정근 작가의 사진과 영상 작품이 전시됐다. 주제가 ‘해녀보다 빨리 늙는 바다’, 최근 백화현상이 도드라지게 나타나고 과일에서 열과 피해가 발생하는 등 전국에서도 기후위기의 여파가 가장 크게 미치는 지역이다.  황폐화되는 바다, 그 속에서 생존의 위기에 놓인 해녀의 처지를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 실내 한켠에 박정근 작가의 사진과 영상 작품이 전시됐다. (사진=장태욱)

▲ 양형석 작가의 조형작이 옛 전경초소 뜰에 전시됐다.(사진=장태욱)

전시장 앞뜰에는 양형석 작가의 조형작이 전시됐다. 옹기나 조약돌처럼 둥근 것들을 군데군데 줄줄이 탑처럼 쌓았는데, 주제가 ‘회기’다. 채석장에서 버려지는 현무암슬러지를 도자기 굽는 방식으로 구워서 생명력을 불러 넣었다. 인간이 훼손한 자연을 되살리고자 하는 열망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전시 장소인 ‘대포동 전경초소’ 은 2023년 전문가 심사를 거쳐 2023-6호 서귀포 미래문화자산으로 선정된 공간이다. 1960년대부터 제주의 해안 경비를 담당하며 약 60년 간 접근이 어려웠던 곳인데, 2021년도에 그 역할이 끝나 유휴시설로 남아 있었다.

서귀포시 문화도시센터는 이 공간이 서귀포 고유문화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이어가는 복합문화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번 전시의 주제에 맞게 ‘노지문화를 쌓다(제주어: 답다)’라는 의미의 ‘노지문화답다’라는 새로운 공간명을 얻었다.


▲ 전시장 입구(사진=장태욱)

김용춘 서귀포시 문화관광체육국장은 “서귀포시 문화도시시업에서 휴먼라이브러리와 미래문화자산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라며 “이번 전시에 그런 사업 내용이 잘 들어 있어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노지문화를 발굴하는 일이 그냥 되는 게 아니고 열정이 필요한데, 이광준 센터장을 포함해 문화도시센터 관계자들이 정말 열정을 기울여 준비해주셨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전시를 기획한 차재 전시감독은 “노지문화는 결국 자연을 대하는 태도인데, 자연과 생활을 강조하려 했다. 이런 걸 추구하기 위해 기후예술 작가님들과도 많이 소통했다.”라고 말했다.

공식적인 전시는 12월 8일까지 열린다. 하지만, 서귀포시 노지문화를 시민, 여행가들과 지속적으로 공유한다는 취지로, 서귀포시 문화도시센터와 대포마을회가 서로 교감을 나눈 것으로 전한다. 이후 시민의 관심에 따라 전시가 더욱 풍요롭게 진화할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와 ‘서귀포사람들’이 지역 파트너쉽 사업으로 작성한 기획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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