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 참사 “일본은 시신을 관에, 대한민국은 가마니에”
남영호 참사 희생자 추모하는 행사 15일 열려
남영호 참사 53주기를 맞아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는 추모제와 추모예술제가 15일에 각각 열렸다. 참석자들은 승객을 살릴 수도 있었지만 사실상 방치한 국가의 책임을 한목소리로 외쳤다. 이제 망각의 세월을 뒤로하고 함께 기억하고 추모하자는데 마음을 모았다.
남영호 조난자 추모제가 15일 오전 10시, 정방폭포 인근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 앞에서 열렸다. 서귀포시와 조난자 유족회가 행사를 주최했다.
이종우 서귀포시장과 위성곤 국회의원 등이 참석하기는 했지만, 행사는 예년과 다름없이 조촐하게 열렸다. 축사나 위로사도 없었고, 참석자의 헌화와 분향이 추모식의 대부분이었다. 나종열 유족회장이 행사를 준비한 시청 관계자와 참석자들에게 감사의 인사를 전하는 게 인사의 전부였다. 300명 넘은 승객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고, 유족들이 오래도록 국가 공권력이 두려워 제대로 숨을 죽이고 살았던 사정을 감안하면, 이들을 위로하기엔 너무도 초라한 행사였다.
이날 나종열 회장은 인사 말미에 “대학교 4학년 때 사고가 났는데, 내 나이가 곧 여든이다”라며 “어머니에게 따뜻한 물 한 컵 드리지 못한 한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사람을 무조건 배워 태웠다. 사고고 났는데 유족들을 때리는 나라가 어디 있나”라고 억울한 심정을 드러냈다.
나 회장은 “시신을 수습하고 가마니에 놓았는데, 어머니 시신은 대마도에서 (일본 정부가)관에 모셔서 왔다”라며 53년 전 대한민국 정부가 희생자에게 했던 처신이 유족 가슴에 깊은 한을 남겼다고 말했다.
유족 나한일 씨는 기자에게 그동안 품었던 억울한 심정을 밝혔다. 나 씨는 “형님이 25세 때 남영호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사고를 당해 목숨을 잃었다. 사고를 당했는데 국가가 나서서 수습하려 하지 않았고, 개인이 일로 치부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가끔 모르는 사람들이 집을 훑어보고 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경찰이나 정보기관 사람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나한일 씨는 “내가 형님 제사를 지내는데, 형님 기일만 되면 추모비를 찾고 싶어졌다. 그런데 어느 날 추모비가 사라지고 없었다. 돈네코에 있다고 해서 가보니 찾을 수가 없었다”라며 “그후 우근민 도지사를 찾아가 항의했더니, 추모비를 현재 자리로 세로 세워줬다”라고 말했다.
남영호 사고가 나자 정부는 이듬해 부두 인근에 ‘남영호 조난자 위령탑’을 세웠다. 하지만 1983년 도로를 확장하는 공사가 진행되면서 위령탑을 철거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때 일부에서 위령탑이 서귀포 관광미행의 이미지에 거슬린다는 의견을 제시해, 서귀포시는 위령탑을 돈네코 법성사 인근으로 옮겨버렸다. 1980년대만 해도 자가용이 보편화되지 않던 시절, 위령탑은 발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잡초만 무성한 상태로 방치됐다.
사고 당시 대부분 희생자의 시신이 실종된 상황인데, 위령탑마저 닿기 어려운 곳으로 옮겨져 버려 유족들은 가족을 추모할 공간마저 잃어버렸다. 유족들이 두고두고 한을 토해내는 이유 가운데 하나다.
2013년 한동주 서귀포시장이 유족의 항의를 반영해 남영호 추모 위원회를 구성하고, 정방폭포 인근에 남영호 위령탑을 설치했다. 이후 이곳에서 매년 12월 15일이면 조촐하게나마 추모제가 열린다.
이날 오후 1시부터 칠십리야외공연장에서 ‘남영호 참사 추모예술제’가 열렸다. (사)남영호 기억과 추모사업회가 행사를 주최하고 연예예술인협회 서귀포지회가 주관했다.
이날 윤봉택 전 서귀포예총 회장은 추모사에서 “2014년 세월호 사고가 발생하고 죽은 어린 아이들이 너무 불쌍해서 아이들을 위해 추모시를 쓰려고 준비하다가 남영호 사고에서 세월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죽은 사실을 확인했다”라며 “그래서 서귀포시민으로 살아가는 게 부끄러워 주변의 뜻을 모아 추모사업을 준비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잊고 살았던 세월이 너무 부끄럽다는 고백이다.
서명숙 제주올레 이사장도 추모예술제에 참석했다. 서명숙 이사장은 “내가 어릴 때 이 부두가 우리의 놀이터였다. 남영호가 출항하고 입항하는 것을 보면서 컸다. 그런데 어느 날 배는 보이지 않고 인양된 시신이 부두에 보였다”라며 “내가 『서귀포를 아시나요』에도 밝혔지만 그 트라우마가 오래 갔다”라고 말했다.
서 이사장은 “당시 남영호 선주 집안도 우리 동네 살았고, 배에 탔다가 사고를 당해 죽은 유족들도 우리 이웃에 많았다. 책임자도 희생자도 다 이웃이었다”라며 “사고로 아버지를 잃은 친구 가운데 엄마가 재혼하면서 성이 바뀌는 일도 봤다. 단 한 번도 남영호를 잊어보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2014년 세월호참사가 발생한 후 사회적 참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1970년 발생한 남영호 참사도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 오래 전 일이고, 책임을 질만한 사람들이 대부분 사망했고, 유족들 가운데 연락이 닿지 않은 사람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그동안 유족 일부가 사단법인으로 유족회를 결성하려 했지만, 행정당국의 무성의로 이마저도 무산됐다. 남영호 진실을 인양하고 유족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고 순탄치 않은 게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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