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는 1970년 12월 15일 1시 25분경 전남 여수시 남면 연도(당시 주소로는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남남동쪽 25km(13.7마일) 지점에서 파도에 부딪쳐 복원력을 잃고 침몰했다.사고 후 12월 26일 법무부장관 배영호가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남영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오후 5시에 서귀포항을 출항해 성산포항에 도착했다. 성산포항에 도착했을 때도 이미 화물은 적재중량을 훨씬 초과한 상태였는데도, 성산포항에서 화물과 승객을 더 실었다. 사고가 뻔히 예견되는 상황인데도 사무장 강O근의 위세에 눌려 선장은
남영호는 1970년 12월 14일, 승객과 선원 210여 명을 태우고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앞선 기사에서 언급한 대로 승객 30여 명은 승선 신고도 되지 않은 채였다. 배는 화물창은 물론이고 객실과 갑판까지 짐을 가득 싣고 있었다.그리고 저녁 7시25분에 기항지인 성산
남영호는 1970년 12월 9일 부산항을 출항해 서귀포항에 도착한 후 10일 출항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당시 남해안에 폭풍주의보가 발효돼, 4일간 서귀포에 체류하고 바다가 잠잠해지고 난 후에서 운항을 이어갈 수 있었다.그리고 그해 14일 오후 5시, 서귀포항을 출항했다
해방 이후 제주도와 외부를 연결하는 뱃길을 1960년대까지 끊겨 있었다. 이후 박정희가 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제주도 하늘길과 뱃길이 열렸다. 기선 덕남호(총톤수 280.3톤, 정원 289명)가 1963년 1월 4일 제주항에서 취항해 제주-목포 구간 운항을
▲ 남영호 참사 53주기를 맞는다. 남영호 참사는 그동안 망각을 강요받았는데, (사)기록과 기억은 앞으로 기억의 파편을 모으는 긴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서귀포의 12월, 남영호 참사의 기억이 뇌리에 되살아나는 계절이다. 53년 전, 300명이 넘은 무고한 생명은 차가운
허남수 씨는 1950년, 하례1리에서 태어났다. 하례초등학교와 효돈중학교, 서귀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학창시절에 태권도를 배워 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다.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2년 동안 태권도를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그때 하례리는 물론이고 주변 하효리와 신례리 아이들
48년 무장대의 공격으로 마을이 불타고 아버지가 희생됐다. 당시 위미리에는 어버지를 포함해 4명이 무장대에 희생됐다.당시 마을에는 무장대 침입에 대비해 성담을 두루고 주민들이 군데군데 망을 봤다. 강도범 어르신은 종지기로 시간을 알리거나 무장대 침입을 알렸다.
어려서 심한 경기를 앓고 죽을 고비를 넘었다. 외삼촌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호랑이고기를 구해 먹었는데, 경기가 완치됐다.몸이 안 좋아 어머니는 딸이 물질 배우는 것을 반대했지만, 졸라서 물질을 배웠다.이후 17살때부터 20살때까지 4년 연속 울산으로 원정물질을 다녀왔다.
위미리 현동호 어르신어려서 4.3 때 집이 불탄 걸 보면서 고구마를 먹었던 기억이 있다.강원도 양구에서 군대 생활 했는데, 거기서 안두희가 군납 회사를 운영하며 부를 축적하는 걸 목격했다.일본에서 온주밀감이 도입되자 재배기술을 배우기 위해 유학을 갔다. 그런데 다녀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