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호의 SOS에도, 일본 보안청의 침몰 통보에도 귀 막은 해경

[기억의 재구성, 남영호 참사 ⑦] 침몰 12시간 지나서야 사고 확인한 정부

남영호는 1970년 12월 15일 1시 25분경 전남 여수시 남면 연도(당시 주소로는 전남 여천군 남면 소리도) 남남동쪽 25km(13.7마일) 지점에서 파도에 부딪쳐 복원력을 잃고 침몰했다.

사고 후 12월 26일 법무부장관 배영호가 국회에 보고한 자료에 따르면, 남영호에는 승객 315명과 선원 19명 등 총 334명이 승선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승객 305명과 선원 17명 등 322명이 사망하거나 실종됐다. 사망한 사람 가운데 시체라도 건진 이는 11명에 불과했다.


▲ 침몰하는 남영호(일러스트 장진주)

구조된 사람은 승객 10과 선원 2명 등 2명에 불과했다. 구조된 선원은 선장 강O수와 통신사 김O지였다. 통신사 김O지가 남영호에 승선하고 있다는 것도 남영호 참사의 원인에 대해 많은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통신사 김O지는 1070년 12월 7일부터 남영호에 승선해 근무를 시작했다. 선원이 바뀌었으므로, 남영상선주식회사는 12월 12일 부산전파감시국에 김O지를 통신사로 선임했다고 신고했다. 그런데 전파감시국은 남영상선주식회사에 남영호는 여객선이라 2급 통신사가 근무해야 하는데, 김 씨는 3급이라 선임신청을 반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O지는 통신사로 남영호에 근무했고, 승선 후 8일 만에 사고를 맞았다.

수차례 반복해서 언급하지만, 남영호 참사의 가장 1차적인 운인은 과적에 있다. 선주 강O진의 암묵적 지시, 사무장 강O근의 위압이 배의 분위기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배가 사고를 당할 것을 직감한 선장 강O수도 출항을 거부할 수 없었다.


사고를 당할 당시 승객 대부분이 객실에 갇혀 있었다. 배가 자정을 갓 넘긴 시간에 침몰했기 때문에, 선원들은 객실에서 미처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당시 객실 밖으로 탈출한 사람은 30명이 넘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탈출한 사람들 가운데 구조된 이가 12명에 불과한 건 대한민국 해안경비대와 해군이 제때 출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가 기우는 동안, 통신사가 무선으로 구조요청을 보냈다고 하는데, 한국 해양경비대는 12시간 가까이 현장에 구조대를 파견하지 않았다.


▲ 부산일보 1970년 12월 16일자 1면. 남영호 실종자가 307명이라고 기록됐는데, 이후 추가 탑승자가 확인됐다. 사고 직후 구조된 12명의 명단과 사진이 실렸다.

남영호 사고에 대해 우리 정부가 손을 놓고 있던 15일 오전, 일본 해상보안청과 주일 미국사령부는 한국정부에 남영호의 조난 사실을 반복적으로 통보했다. 사고 이후 국회진상조사위원회에 보고된 바로는 일본 해상보안청은 한국에 ‘12월 15일 8시35분 일본어선 고겐마루가 북위 34도 동경 128도 해상에서 한국인 4명을 구출하였으나 언어 불통으로 상세한 상황을 알 수 없으나 ‘미안미안호’라고 하는 것 같음’이라고 통보했다. 그런데 해양경비대와 해군, 체신부 등 관련 기관과 부서는 서로 정보교환도 하지 않았고, 발 빠르게 대처하지도 않았다.

당시 제주도 지역구 국회의원이던 양정규 의원은 사고가 발생했던 15일 일본에 있었는데, 일본신문에는 15일 오전에 이미 ‘일본 해상보안청이 여러 차례에 걸쳐 조난 경위를 한국 해경대에 전문으로 알렸다’는 보도가 쏟아졌다고 한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정부가 늑장 대응하는 걸 보면서 오죽이나 답답했을까?

미 공군이 오전 11시57분 현장 확인을 위해 헬리콥터 한 대를 현장에 보냈다. 그리고 우리 경찰항공기 503호가 출동해 오후 1시30분 경 상백도 동쪽 20마일 지점에서 밀감상자와 조난자 2명이 물에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우리 정부의 현장 확인이 사고가 발생한 후 12시간이 지나서 이뤄졌다.

그러다보니 구조작업에서도 정부의 실적은 한심했다. 당일 오전 8시 25분경 인근을 지나던 일본어선 ‘고겐마루’가 최초로 현장을 확인하고 구조에 나선 것을 시작으로 일본어선이 조난자 8명을 구조했다. 우리 해경 201정이 조난자 3명을 구조했는데, 오후 3시 무렵이었다. 16일 새벽 5시 무렵, 우리어선 시영호가 1명을 추가로 구조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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