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나나 한 그루 당 수입이 30~40만원, 젊어서 폼좀 잡았다”

하례1리 허남수 씨 인생이야기

허남수 씨는 1950년, 하례1리에서 태어났다. 하례초등학교와 효돈중학교, 서귀농업고등학교를 졸업했는데, 학창시절에 태권도를 배워 선수로도 이름을 날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2년 동안 태권도를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그때 하례리는 물론이고 주변 하효리와 신례리 아이들이 허남수 씨에게 태권도를 배웠다. 불모지였던 주변에 태권도를 전수한 것을 일생의 보람으로 여긴다.


▲ 하례1리 허남수 씨


1971년 육군에 입대했는데, 당시는 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시절이다. 당시 부대장이 베트남전에 참전할 것을 권했지만, 부모님이 크게 걱정할 것을 염두에 두고 파병대에서 이름을 빼주라고 간청했다. 형님이 앞서 베트남전에 참전했을 때, 부모님 걱정이 여간하지 않았다고 한다.

허 씨는 “당시 우리 동기 6명이 베트남에 파병됐는데, 그 가운데 4명이 전사했다”라며, 참전하지 않았던 게 여간 다행이 아니라고 말했다.

1974년에 제대하고 지금의 아내와 결혼했다. 그리고 부모님이 물려준 농지 1500평에서 조생온주를 재배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자 제주도에 바나나 농사가 도입됐다. 군 장교 출신인 이광석 씨가 하효에서 최초로 시작했는데, 이 씨에게서 재배법을 배우고 묘목을 구입해 농사를 시작했다. 1982년 당시에 도내에서 25농가가, 하례리에서 5농가가 바나나를 재배했다.

당시 바나나 가격은 12kg 한 상자 기준으로 쌀 때는 6만원, 비쌀 때는 12만원에 이르렀 다. 한 그루에서 30~50kg 안팎이 열렸다. 한 그루에서 3~4상자가 수확되는데, 돈으로 치면30만원 이상을 안겨줬다. 바나나 한 그루 수익이 고위직 공무원 월급에 육박했다.

허 씨는 “그때 나이가 30대라 혈기 왕성했는데, 돈을 벌었으니 폼 좀 잡고 다녔다”라고 말하며 크게 웃었다.

바나나는 재배도 쉬웠다. 온도를 맞춰주고 물만 잘 주면 별 탈 없이 잘 자랐다. 병충해도 응애를 제외하면 별로 없었다. 고가의 비닐하우스 시설비를 감당할 수만 있으면, 돈을 버는 게 쉬운 작물이었다. 당시 비닐하우스 시설비는 평단 2만5000원 정도였다고 한다.

재배가 쉽고, 돈까지 벌리니 주변 농가들이 바나나 농사에 뛰어들었다. 처음 품목조직으로 제주바나나협회가 있었는데, 1986년이 지나자 회원 수가 너무 많아 한라바나나협회가 추가로 설립됐다. 허남수 씨는 한라바나나협회가 설립할 당시, 이사로 참여하며 설립을 주도했다.

그런데 1991년, 우르과이라운드 협상 타결을 앞두고 바나나 시장이 개방됐다. 외국에서 값싼 바나나가 무관세로 물밀듯 밀려들기 시작했다. 결국 1992년이 지나자 바나나 농가들은 농장을 폐원하고 다음 대체작물로 갈아탔다.

처음에는 파인애플이나 백합, 금감 등이 유행하다가 1990년대 후반이 되자 조생귤 가온하우스재비가 성행했다. 그리고 2000년대 중반기 이후에는 한라봉과 천혜향, 례드향 등이 차례로 도이돼, 만감류 재배가 유행하는 중이다.

허 씨는 “나는 일찍 시작해서 돈을 좀 만졌지만, 뒤늦게 시작한 사람들은 시설비 대출을 갚지 못해 시설을 물론이고 땅까지 잃는 일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농민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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