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속한 세월, 사촌 포함 7형제 가운데 나만 살아남았다”

[구술] 남원읍 출신 홍태생 삼춘의 가족사

일제강점기와 해방, 근대화의 모든 과정은 민초들에게 폭력으로 점철된 역사였다. 이 기간을 거치는 동안 역사의 폭력을 단 한 차례로 피하지 못한 가족이 있다. 가족사의 모든 걸 지켜본 홍태생 삼춘이 그동안 가족이 격은 일을 전했다.

홍태생 삼춘은 1942년, 서귀포시 남원읍 남원리에서 3남3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남원리 출신이고, 어머니는 표선면 하천리 출신이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었기 때문에, 가족사 많은 것을 어머니가 생전에 들려준 대로 이해한다.


▲ 1942년생 홍태생 삼춘(사진=장태욱)

■ 어머니

어머니는 1916년이셨는데, 열여섯 되던 해에 남원리로 시집을 왔다. 어머니는 생전에 “그대로 있으면 일본인 위안부로 끌려갈 것 같아서 일찍 시집을 왔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후 일본과 조선, 대만 등지에서 여성들을 끌어다가 군대의 성노예로 삼았다. 일제는 취업 사기와 협박, 납치 등의 방식을 통해 많은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했다.

어머니는 위안부로 잡혀가지 않으려고 어린 나이에 당시로서는 먼 동네로 시집을 왔다. 혼례를 올리는 날 아침에 하천리를 출발해 하천리-세화리-토산-의귀리를 거쳐 시집이 있는 남원 양지물동산까기 걸어서 왔다. 아침에 친정을 나섰는데 시집에 도착해보니 저녁이 되었다고 한다.

시집에 와서 2년 후인 18살에 첫 아이를 낳았다. 홍태생 삼춘에게는 큰 누나에 해당한다. 이후 남편이 돌아가실 때까지 16년 동안 슬하에 6남매룰 두었다. 그리고 1948년 막내가 태어나던 해에 남편이 죽고, 32세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됐다. 어머니는 97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까지도 정신은 거의 온전했다.


▲ 7월 26일 홍태생 삼춘이 시민들 앞에서 가족사를 전하는 장면(사진=정병욱)

,■제주 4·3 때 집안은 풍비박산

제주4·3 때 집안은 큰 화를 당했다.

국방부는 1948년 11월 21일 제주도 전역에 대한 계엄령을 선포했다. 11월 23일에는 교통제한과 소개(疏開) 등의 내용을 담은 계엄령 포고령 제1호를 발표했다. 그해 12월 중순부터는 중산간 마을에 대한 일제 소개령이 내려졌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큰아버지는 행방불명됐다. 남원상동에 살던 큰아버지 아들들, 그러니까 홍태생 삼춘의 사촌들도 대부분 사망했다. 작은 아버지는 토평 처가에 가던 도중에 괴한들에게 피살됐다. 피살된 이유도 알 길이 없고, 겨우 시신이 암매장된 현장만 확인됐다.

당시 집안 어르신들은 남원 상동에 살았는데, 소개령이 내려져도 제때 피난을 떠나지 않아 화를 당한 것이다.

아버지는 당시 결혼해 분가하고 남원 아랫동네에 살고 있었다. 충분히 화를 면할 수 있었는데, 가족이 소개령을 따르지 않은 것에 연좌되어 피살됐다. 홍태생 삼춘의 형제 6남매와 어머니의 삶이 풍비박산이 됐다.

■ 형님 홍병생 씨

홍태생 삼춘은 “우리 형님이 얼굴도 잘 생겼고, 멋쟁이였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집안이 가난한 데다 제주4·3에 연루된 집안이니, 취업이 쉽게 될 턱이 없었다. 홍병생 씨는 배를 타기로 결정했다.

고모가 예전에 여수로 물질을 갔고 거기서 남자를 만나 결혼했다. 고모가 아들을 낳은 게 강봉춘 씨인데, 덕남호 선장이었다. 홍병생 씨는 사촌형을 찾아가 배를 탈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강봉춘 씨는 “형제가 같은 배를 타는 법은 없다.”라며 다른 곳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사촌형이 소개해준 게 남영호다.


▲ 남영호 조난사고 위령탑에 홍병생 님의 이름이 새겨졌다.(사진=장태욱)

남영상선주식회사는 부산 영도에 소재한 조선소 경남조선공업주식회사를 통해 362톤, 정원 321명의 여객선을 건조했다. 남영호는 1967년 12월 31일 진수하고 이듬해 3월에 준공을 마쳤다.

홍병생 씨는 어려운 선발과정을 거쳐 일기원으로 남영호에 탑승했다. 조선소에서 남영호에 올라 1970년 12월 15일, 침몰할 때까지 근무했다.

남영호가 침물하는 날의 일을 홍태생 삼촌은 또렷하게 기억한다. 홍태생 삼촌은 당시 목수였는데, 남원읍 태흥리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작업을 하던 도중에 지인이 라디오에서 남영호 조난사고 소식을 듣고 알려줬다. 그때 어머니는 형수님(홍병생 님 아내)과 조문을 가고 집에 없었다.

홍태생 삼춘은 동료 목수의 자전거 뒷자리에 타서 남원파출소로 갔다. 남원파출소에 가서 진위를 확인했는데, 순경은 남영호 침몰사고가 발생한 사실을 전했다.

그 길로 서귀포수상파출소(지금의 서귀포해경파출소) 주변 사무실에 갔다. 많은 사람은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몰려들어 대혼란이 일었다. 회사 사무실에 사고대책본부가 마련됐지만, 상황을 설명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음 날에 시신이 들어온다고 해서 가봤는데, 사무실이 없어져버렸다. 사무실로 쓰던 창고는 시신 안치실로 바뀌었고, 사고대책본부는 남군청사로 옮겨졌다.

안치된 시신을 확인했는데 물속에 오래 있어서 살같이 벗겨지거나 눈알이 없어지는 등 시신은 크게 훼손되어 있었다. 시신 얼굴로는 주인을 확인할 수 없어 신분증이나 흉터 같은 걸로 확인했다. 길거리에 두건을 쓰고 우는 사람이 많았다.


형이 사고를 당할 즈으에 군에 있던 동생(홍무생)이 휴가를 나왔다. 홍무생 씨는 집에도 들르지 않고 대책본부가 마련된 남군청에 쳐들어 갔다. 태권도 유단자였던 홍무생 씨는 대책본부 유리창을 발로 찼는데, 큰 유리가 한꺼번에 무너졌다. 현장에 있던 경찰관이 울면서 “왜 이러시냐?”라며 자제를 당부하자 동생은 “너희들이 똑바로 했으면 이런 사고나 났겠냐?”라고 고함을 쳤다.


▲ 위령제에 참석해 묵념하는 장면. 앞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홍태생 삼춘(사진=장태욱)


남영호 사고가 나고 지금의 서귀포수협 근처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그런데 어느 날 보니 도로를 확장한다고 위령탑이 철거됐다. 위령탑이 법호촌으로 옮겨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자가용이 없는 사람은 찾아갈 수 없는 자리였다. 그런데 어느 날 홍태생 삼춘이 목수일을 하러 법호촌 소재 사찰에 갔는데, 주지스님이 인근에 남영호 위령탑이 있다는 걸 알려줬다. 가봤더니 무덤 몇 기와 탑이 있었다. 그 길로 다신 거기로 가지 않았다.

■ 동생 홍무생 씨

홍태생 님에게 동생 홍무생 씨는 생각할수록 마음 아픈 동생이다. 어릴 적에 동생을 돌보다가 잠시 버려뒀는데 솔가지에 눈이 찔려 흉터가 남았다. 어른이 되도록 흉터가 사라지지 않아 미안한 마음이 든다.

홍무생 님은 몸이 날씬하고 운동을 잘했다. 친구들과 어울리기도 잘해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중학교 2학년 때 한일국교정상화에 반대하는 데모가 크게 일었다. 친구들과 데모 현장을 구경하던 도중에 경찰서로 끌려가 조사를 받게 됐다.

학교에서 퇴학될 위기에 몰렸는데, 당시 남원면장이 퇴학을 면하도록 힘을 써줬다. 퇴학 대신에 효돈중학교로 전학조치됐는데, 거기에서 배구를 배웠다. 집에 돈이 없어서 체육특기생으로 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를 졸업하자 남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남주고등학교에서는 태권도 특기자로 활동해, 2단 자격을 받았다. 3단을 취득하려면 육지로 가야 하는데, 그럴 형편은 되지 않았다.

남주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 여기저기서 태권도를 지도하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해군에 입대해 7373호 전투함을 타고 군대생활을 했다. 그리고 군대생활 17개월 만에 월남 파병부대에 배속돼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

당시 홍무생 님이 받은 월급은 어머니에게 들어왔는데, 월 9500원 정도로 1만 원도 안 됐다고 했다.

역사학자 박태균이 〈한겨레〉에 기고한 내용으로는, 베트남 전쟁 당시 우리나라 사병이 받는 전투수당은 최고 37 ~ 54달러, 병장 월급은 1.6달러에 불과했다. 1970년 달러에 대한 원화의 환율은 357원, 월 평균 40달러를 받았다고 가정하면 월 수입 1만4,000원이 된다. 사병이 현지에서 쓰는 돈과 환전 수수료를 제외하면 집에서 수령하는 돈이 월 1만 원도 되지 않았던 것이다.

홍무생 씨는 베트남에서 제대하고 귀국했는데, 문제를 일자리를 찾기기 쉽지 않았던 점이다. 어느 날부터 횡설수설하고 베트남에서 겪은 일들을 혼자 입에 올렸다. 알아듣지 못할 말을 자주 했고 술을 마시는 휫수가 늘었다. 그러더니 제대 5년여 만에 세상을 떴다.


▲ 삼춘은 사촌 포함 7형제 가운데 홀로 살아남았다고 말했다.(사진=정병욱)

■ 홍태생 삼춘 본인의 삶

제주4·3으로 집안 어른들이 다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홀로 6남매를 키웠다. 집은 늘 가난해 학교 가기도 쉽지 않았다. 학교 가는 대신에 늘 집에서 동생을 돌봐야 했다.

6남매 가운데 차남이어서 친척 집에 양자로 입적했다. 양자라고 하지만, 양부모의 도움도 받지 못했다. 양아버지도 제주4·3 때 사망했다. 동네 순경이 와서 함께 나갔는데 이후로 실종됐다고 한다.

1966년에 결혼하고 28년 동안 셋방살이를 했다. 그나마 우연한 기회에 목수 일을 배워서 그 일로 평생을 먹고 살았다. 목화백화점 건축현장에서 일했던 게 기억에 생생하다. 하루 인건비가 2,400원하던 시절이다.

부인과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딸 모두 결혼해서 서귀포시내에 자리를 잡고 산다.

홍태생 삼촌의 삼촌에게 큰 누나가 있었다. 홍태생 삼촌이 초등학교 3학년 되던 해에 결혼을 했는데, 임신하고 친정에 와서 애기를 낳다가 돌아가셨다. 조카는 친가에서 키우기로 하고 데려갔는데, 세 살에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근대는 민초에게 평화의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제주도민이 근대를 통해 겪은 비극은 참으로 혹독했다. 홍태생 삼촌은 “우리형제와 사촌을 포함하면 남제 형제가 7명인데, 나만 살아남았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사)기록과 기억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