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유자, 거부할 수 없는 유혹

[제주 당유자 ①] 사람은 당유자를, 당유자는 사람을 지켰다

난 당유자를 사랑한다.

당유자는 시기를 알 수 없을 만큼 오래 전부터 이 섬에서 자생했는데, 몇 차례의 기후변화에도 여태 잘 살아남았다. 특별한 농약도 없었고 수탈에서 벗어나려고 백성이 귤나무를 죽이는 일도 있었지만, 당유자만은 농가의 마당에서 잘도 버텼다.


▲ 동홍동 당유자 고목(사진=장태욱)

당유자 나무는 한겨울에도 굳세게 버티며 초록을 기상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모과보다도 큰 열 개가 나무에 매달린 채 눈서리 맞으며 누렇게 익어가는 모습은 외면할 수 없는 진풍경이다. 과거 제주도를 방문한 문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당유자를 찬양한 이유이기도 하다.             




당유자는 약이 없던 시절 섬사람에게 치료제이자 건강보조식품이었다. 감기에 걸린 사람, 기가 허약한 사람은 당유자를 달여 마시게 했는데, 특히 임신한 여성에게 귀한 과일이었다. 가난한 섬사람들은 당유자를 통해 비타민을 섭취하고, 기를 보충했다. 당유자는 사람을 지켰고, 사람은 당유자를 지켰다.

당유자를 사랑하기에 나는 당유자 고목이 있는 집을 부러워한다. 특히, 그 집이 오래된 고택이면 더욱 그렇다. 서귀포시 동홍동 중산간동로 변 어느 식당에 100년 가까운 당유자 나무가 있다. 그 집 음식 맛이 좋기도 하거니와 당유지가 있는 풍경이 따뜻하여 종종 식당을 찾는다. 신례1리 김종석 전 위미농협 조합장의 집 뒤뜰에도 오래된 당유자 나무가 있다. 고목이 오래된 고택과 어우러진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주인장 앞에서 부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 신례리 당유자 고목(사진=장태욱)

부러우면 지는 것이라고, 3년 전에 오일장에서 묘목을 구해 마당에 당유자 한 그루를 심었다. 나무가 얼마나 기운이 세던지 그새 사람 키만큼 자라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지난해에는 열매 7개가 달렸는데, 크기가 아기 얼굴만큼 했다. 겨울에 수확할 때까지 열매가 자라서 익는 과정을 지켜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세월이 흐르면 이 나무도 고목이 되어 집안의 자랑거리가 되고, 누군가에는 부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수확한 당유자로 청을 만들었다. 우선 깨끗이 씻고, 껍질을 포함해 열매를 잘게 썰었다. 그리고 꿀을 섞어 통에서 시간을 두고 절였다. 청을 뜨거운 물과 섞어서 차로 마셨더니, 맛과 향이 일품이다. 18세기 조선의 선비 정운경은 ‘탐라귤보’에 당유자에 대해 이르기를 ‘부드럽고 매끄러우며 맛이 진하고 상쾌하다’라고 기록했는데, 바로 그대로다. 정운경은 당유자가 옥폐(沃肺, 기관지)를 낫게 하는 데는 최고라고 했는데, 목을 시원하게 하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

며칠 전 (사)제주기록유산연구원 회원들을 초청해 집에서 식사를 함께 했다. 식사가 끝난 후 당유자차를 나눴는데, 맛과 향에 대한 찬사가 이어졌다. 그리고 고전에 나타난 귤과 당유자가 화두로 올랐다.


▲ 당유자 열매와 당유자 청(사진=장태욱)

‘남환박물’을 번역한 이진영 선생은 고문서에 나타난 바로는 조선시대 귤은 종묘제사에 꼭 필요한 물건이어서, 귤을 진상하는 문제 때문에 많은 목사가 파직을 당했다고 했다. 당유자는 어릴 때 어머니가 대추, 생강과 함께 오래 달여서 줬던 기억이 있다며, 추억의 과일이라고 했다.


당유자 차가 익어가는 계절이다. 그 맛과 향은 차도 넘치고,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차고 넘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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