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도청에 총알 쏟아지는 악몽, 가련한 인생을 앗아갔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교생으로 시민군에 참여했던 김재귀 씨, 홀로 지내가 사망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고등학생으로 시민군으로 활동했던 김재귀 씨가 사망했다. 김 씨는 게엄군이 1980년 5월 27일 전남도청을 점령할 때까지 시민군과 함께 총을 들고 도청을 사수했는데, 당시 총격에 대한 기억 때문에 평생 극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았다. 장례는 (사)5.18 민중항쟁 기동타격대 동지회와 5.18민주항쟁고등학생동지회 장으로 치러졌다.

5.18민주항쟁고등학생동지회 관계자는 최근 “김재귀 동지가 광주 자택에서 홀로 지내다 사망한 사실을 11일 확인했다.”라며 “그가 트라우마 때문에 밤에 술을 마시지 않고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홀로 살면서 술을 많이 마셨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 故 김재귀 씨가 지난해 6월, 서귀포를 방문해 광주민주화운동에서 겪은 경험을 전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지 않아 광주에서 생을 마감했다.(사진=장태욱)

김재귀 씨는 고등학교 2학년에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했다. 어려서 불우한 가정 때문에 정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고 비정규 학교인 학산고등공민학교(동일미래과학고등학교의 전신)에 진학했다.

1980년 5월 17일, 전두환 신군부가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계엄군이 광주에 투입됐다. 계엄군이 광주에서 시민과 학생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가하자 그는 5월 20일 아버지의 감시를 뚫고 시위대 버스를 탔다. 거기서 방송국이 불에 타고, 시신을 싣고 가는 리어커를 보았다. 리어커에 실려 가는 시신에서 피가 흐르는 장면, 어린 청소년의 눈엔 충경적인 장면이었다.

그 길로 총을 들고 시민군에 합류했다. 5월 24일 시민군이 총을 반납하자는 그룹과 계속 싸우자는 그룹으로 나뉠 때, 김재귀 씨는 총을 반납하지 않고 도청에 계속 머물렀다. 5월 26일 어머니가 어린 아들을 만류하기 위해 전남도청에 찾아왔는데, 김재귀 씨는 “어차피 시민군에 몸담았으니 여기서 죽겠다.”라고 말했다. 당시 어머니 가슴에 못을 박은 걸 평생 후회하며 살았다.

그리고 시민군이 기동타격대원을 모집한다는 얘기를 듣고 거기에 지원했다. 고등학생은 안 된다는 만류에도 가입하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결국 기동타격대 7조에 속해서 순찰 임무를 받았다.

5월 26일 저녁 계엄군이 몰려와 도청 주변을 장악했다. 게엄군은 도청 후문에서 총을 쏘았고, 그때 고등학생 가운데 사망자가 나왔다. 도청에 남아 있는 시민군은 모두 죽음을 직감했다.


▲ 청소년 기의 기억이 평생 악몽처럼 그의 삶을 짓눌렀다고 했다.(사진=장태욱)

그리고 27일 새벽에 공수부대가 도청 안으로 총을 난사했고, 10대 청소년 10명이 현장에서 목숨을 잃었다. 군인들이 도청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항복하겠다는 신호로 손을 들었는데, 오른손이 군인이 쏜 총탄을 맞았다.

군인에게 살려달라고 외치며 손을 들자, 계엄군이 나오라고 소리쳤다. 그 길로 군의관에게 간단한 치료를 받고 국군통합병원에서 수술을 받았다.

이후 재판에서 최하 3년, 최고 5년 형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학교에서 퇴학되고 출소 후에는 취업도 안 됐다. 어쩌다 공장에 취업했는데, 정보요원이 다녀가면 사장은 ‘더는 안 되겠다’라며 김 씨를 해고했다. 한동안은 일용직 노무자 생홀을 했다.

5월 26일 밤과 27일 저녁에 겪은 경험은 그가 죽을 때까지 트라우마로 괴롭혔다. 밤에 불을 끄면 공포가 억눌렀다. 술을 마시지 않고는 도저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군인이 밤마다 꿈에 나타나서 허구헌 날 고함을 지르며 잠에서 깼다. 트라우마 센터에서 치료를 받는데 치료가 되지 않았다.

1992년에 결혼을 했는데, 아내와도 갈라섰다. 아들과 딸이 있었는데, 모두 전 부인이 키웠다.

장례는 14일까지 (사)5.18 민중항쟁 기동타격대 동지회와 5.18민주항쟁고등학생동지회 공동葬으로 치러졌다.

장례를 주관했던 최치수 5.18민중항쟁고등학생동지회장은 “김재귀 동지를 평생 아우같이 생각했는데 이렇게 보내니 참으로 황망하다.”라며 “장례에 참여했던 선배 동지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1980년 5월 도청에 총알이 우박처럼 쏟아지는 기억을 지울 수 없다. 김재귀 동지가 겪은 트라우마를 당시 도청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겪는다.”라며 “광주민주화운동이 국가의 민주화에 기여했는데, 우리 개인이 받은 상처는 상처대로 남는다.”라고 말했다.

최치수 회장은 “그래도 김재귀 동지의 전 부인과 자녀들이 와서 장례식장을 끝까지 지켰다. 두 자녀가 정말 예의바르게 잘 컸고, 좋은 직장을 얻어서 살고 있더라.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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