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하게 시작한 칸트철학, 이게 운명인가요?

[기고] ‘제주에서 『순수이성비판』읽기’ 수강한 시민 이인섭 씨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원장 진희종)이 올해 칸트 탄생 300주년을 기념해 ‘제주에서 『순수이성비판』읽기’ 강좌를 열었습니다. 9월 25일부터 10월 30일까지 5차에 걸쳐 강의 칸트 철학의 정수를 탐구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칸트 철학 연구자인 전남대 김상봉 교수가 강의를 맡았습니다.

칸트 철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쉽지 않은 학문입니다.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원도 그런 점을 의식해 객석을 채우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표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강의는 기대 이상으로 진지하고 흥미롭게 진행됐습니다. 강좌를 수강한 시민 이인섭 씨가 소감문을 보내왔습니다. 소감문 전문을 싣습니다.
-편집자 주


▲ 강의를 듣는 이인섭 씨(사진=장태욱)


저희가족이 모이면 수학, 생물학, 물리학 전공자가 있습니다. 철학이 빠졌습니다. 그렇다보니 다 저마다 내가 말이지! 합니다. 전 그 때마다 생각합니다. ‘으이그 개똥철학!’ 그렇습니다. 내 맘대로 생각한 세월이 거의 60년, 100세 시대라 하면, 이대로라면, 개똥철학 할 시간이 아직도 40년이나 더 남았습니다.

고등학교 때, 대학 1학년 때 겨우 윤리 과목으로 접해야 했던 (표지만)철학이 40년 만에 처음으로 그리고 정식으로 철학 강의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읽기’라니, 게다가 김상봉 교수님의 철학 강의를 이곳 서귀포에서 듣게 되다니, 와우! 로또 같은 인생, 정말 저에게는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처음으로 받아든 교재에서 그리고 교수님의 설명에서 쏟아지는 생소한 철학 용어, 일상에서 전혀 볼 수 없는 문장 패턴 때문에 소심하게 겁을 먹은 것도 사실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익숙해지겠지’했지만, 시종일관 그렇지 않았습니다. 1달여 기간 매주 이곳 서귀포를 오는 길은 가슴 설렘도 있었지만, 가슴 한 구석에는 불안감도 없지 않았습니다. ‘나만 이해 못하는 거 아녀?’ 40년 전 양자역학을 이해 못해서 겪었던 불안감과 같은 걸 경험해야 했습니다. 내 인생에 양자역학을 이해할 수 있을까? 자포자기하던 마음 그대로가 재현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 강의 소감을 전하는 이인섭 씨(사진=장태욱)

그래도 중간에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 교수님께서 저렇게 열성적으로 강의를 하시는데, 그리고 원장님 얼굴도 있고 체면은 지켜 드려야지, 예라 모르겠다. 노자께서 길을 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고… 가다보면 비로서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깨닫게 되고, 어떤 일을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고… 하다보면 비로서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 듣다보면 이해하는 날이 오겠지! 오감을 집중했습니다. 어느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라바르 3층의 작은 공간에서 청중들이 가득 앉아 있고, 배우 김상봉 교수님은 무대에서 칸트 역을 맡아 열정을 토해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순간순간이 이어지면서 벌써 5차시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5차시 강의가 끝나면 저 무대는 사라지고, 이 순간도 사라지겠지!? 그러니까… 맞다! 강의를 하시는 저 공간, 그리고 순간순간 시간으로 구성된 교수님의 연기는, 내 의식 안에서 영화 필름처럼 기억으로 남겠다 싶었습니다. 그러니까, 무대에서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만든 인식의 형식(뼈대)이고, 교수님의 연기는 그 형식(뼈대)으로 받아들이는 감각의 경험일 뿐이다! 이게 이번 강의의 핵심이라는 걸로 위안을 삼고 그냥 참여한 것에 의미를 두는데 퉁치기로 했습니다.

강의 본문에서 ‘Erkenntnis’라는 단어가 가슴에 꽂혔습니다. 깨달음이라는 뜻이 있음을 알았을 때, ‘세상을 어떻게 인식하고 깨달을까?’를 고민해 보았습니다. 가톨릭 금서로 알려진 도마복음에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너희가 죽기 전에 깨달으면 죽음을 맛보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죽으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라는 제자의 물음에, 예수께서 말씀하시길, “니가 끝을 이야기 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시작은 찾은 것이냐? 시작이 없으니 끝도 없느니라.” 그래 시간은 원래 없는 거야, 시간은 세상을 이해하기 위해 필요한 선험적인 형식이고 내 안에 있는 거야! 오늘로 강의의 무대는 막을 내라고 우리는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합니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제대로 이해할 때까지 그 길을 갑니다. 결국엔 이해가 아니고, 그대로를 받아 들여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그렇게 우리 인생은 프로그램된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봅니다.


▲ 강좌가 마무리된 후 기념 촬영. 왼쪽에서부터 카페 라바르 박재완 대표 - 김상봉 교수 - 진희종 원장 - 이인섭 씨(사진=장태욱)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을 모자라고 하는 어른들의 편견을 비판하는 생떽쥐페리의 어린왕자가 생각납니다. 존재자 너머 존재를 보기 위해 어린왕자는 하루에도 해가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것처럼, 이제 그렇게 철학의 길을 걷다가, 서쪽 하늘에 노을이 지면 이곳을 추억처럼 떠 올릴 것 같습니다.

어제는 가게가 휴무라 잠시 이곳 서귀포에서 ‘서귀포사람들’의 편집장이신 장태욱 편집장을 만났습니다. 제가 우리는 동기 아닙니까? 김상봉 교수 님이 가르침 아래 동문수학한 동기 아닙니까? 했습니다. 장태욱 편집장님 왈, 맞습니다. 그리고 우린 ‘서귀포 칸트학파 1기’ 맞죠! 하는 겁니다. 순간 내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짧은 기간이지만, 김상봉 교수님을 스승님으로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건강하게 제주도에 오랫동안 머무르시고, 덕분에 우리 제주도가 김상봉 보유도가 되길 희망합니다. 그리고 함께 동문수학 하신, 동기 여러분들도 하시는 일에 행운도 따르길 기원합니다. 끝으로 이 자리를 마련해 주신 제주도평생교육장학진흥원 진희종 원장님 이하 스텝진들께도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고맙습니다. 


2024년 11월 이인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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