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인간 창조하듯 인간이 자기 형상대로 창조한 게 AI

도민대학 ‘『순수이성비판』읽기 Ⅱ’ 제 2강 16일 저녁에 열려


인공지능에 대한 질문 조정하기 (feat.함석헌)

27일 오후7시 서귀포시민문화체육복합센터에서 김상봉 교수의 『순수이성비판 읽기』Ⅱ 두 번째 강의를 들었다. 지난 시간에 김상봉 교수는 인공지능을 화두로 던졌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압도하고 대체할 것인가 질문이 불러일으킨 공포감은 철학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칸트 전문가인 당신에게 질문 세례가 몰리고 있다는 ‘업계’(?)의 후문은 한편 반가운 일이면서도 한편은 ‘웃픈’ 일이기도 했다.

인공지능의 출현이 마치 영화 <혹성탈출>처럼 ‘인간 VS 인공지능’의 프레임으로 확산되면서 질문의 수준이 단편적으로 떨어졌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프레임대로 가다간 ‘인공지능의 월등한 능력’이 쟁점이 되는 게 아니라, ‘인간의 퇴행적인 수준’이 쟁점이 될 게 분명했다.


▲ 도민대학 ‘『순수이성비판』읽기 Ⅱ’ 두 번째 강좌가 16일 저녁에 열렸다.

김 교수는 두 번째 강의 서두에 다시 함석헌 선생을 소환했다.

“(기계에 대한 이야기) 기계는 우리가 물질과 접촉하는 점이다. 기계는 볼 수 없는 정신에 관한 것을 볼 수 있게 만든다. 그것이 아니고는 물질 속에 들어 있는 보물의 세계를 우리는 알 수도 가질 수도 없다. 앞으로 우주적인 살림을 하는 인간에게 기계는 놓칠 수 없는 기관이다. (눈이 우리의 기관이듯이) 그러나 지나간 생물의 진화가 보여주는 것처럼, 그 기관이 진화할수록 그것이 전체의 균형을 깨뜨리고 발달할수록 통일을 잃고 멸망에 빠질 것이다.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인격에서는 지혜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원자 하나를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은 원자폭탄의 원인을 찾아낸 인간답지 못한 일이다. (중략) 만든 마음은 만들어진 물건보다 더 크다는 사실을 믿는 자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듯이, 사람도 또 자기 형상대로 기계를 만든다. (중략) 사람의 혼이라는 인간의 렌즈를 가운데 놓고 하늘나라와 기계의 나라가 대칭적으로 설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물건에 새 종교의 성격이 나타날 것이다.”

인간이 기계를 만든다는 것은 자기의 형상에 따라서 그런 것이다. 인간의 형상이 과연 무엇일까? 김 교수는 그것을 따지는 건 철학자의 일이며, “인간의 형상은 로고스”라고 말하며 ‘칸트’와 인공지능 사이에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묘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 김상봉 교수(사진=장태욱)

“인공지능은 인간처럼 생각하는 기계를 만든 것이다. 인간의 형상이 윤리적인 능력과 사유의 능력이 결합해서, 신이 인간을 창조했을 때 기대했던 것 외에 자기만의 길을 가는 것이다. 나도 선과 악이 뭔지 알고 싶어요.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다. 창조의 원래 의도가 어긋나 버린 것이다. 기계에 대한 창조도 마찬가지다.”

‘병 주고 약 주고’도 아니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AI는 인간의 사고라는 한계에서 작동하지만, 인간의 사고는 자신의 창조자인 신의 기대를 여지없이 깨뜨렸기에 기계 역시 인간의 기계를 깨뜨린다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 아닐까? 나는 강의를 들으며 ‘선생님이 왜 함석헌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실까?’ 의아했다. 하지만 이야기를 들으면서 ‘로고스’의 비밀을 풀어야 AI가 어떻게 펼쳐질지 이해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칸트 철학은 AI의 ‘예측불가능성’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할까?

인공지능에 대한 기대감, 공포, 궁금함, 예측불가능성은 감정과 욕망의 눈덩어리로 모이고 하나의 질문이 되어 칸트라는 주소를 찾았다. 왜 인공지능은 칸트에게 질문했을까? 이것이 가능의를 들으면서 내내 들었던 의문이었다. 칸트는 영국의 경험론과 대륙의 합리론을 종합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특히 지독한 회의론 철학자였던 데이비드 흄은 칸트의 루틴을 일시적으로 깨뜨릴 정도로 큰 영향을 미쳤다. 흄이 감각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철학을 설파한 사실은 많이 알려졌다. 칸트는 흄의 회의론을 반박하며 ‘생각의 자발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감각과 경험 속에는 원인과 결과가 담겨 있지 않다. 경험이 주어지기 전에 원인이라는 표상을 자발적으로 만들어내고 그것을 잣대로 세상을 이해하는 ‘내장 프로그램’이 인간에게 있는 것이다. 나는 양치질을 할 때 컵이 없으면 손바닥을 오므려서 고인 물로 입을 헹군다. 그 때 나의 손은 손이 아니라 ‘컵’이다. 컵이라는 개념이 내 안에 존재하지 않았다면 나는 수도꼭지에 고개를 숙여서 손수 물을 마셨을 것이다. 가뜩이나 나이가 들어서 허리를 숙이기가 어려운데 그건 안 될 일이다.




이때 ‘자발적’이라는 건 리액션이 아니다. 천부적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설명도 말끔하지 않다. 맹자의 사단(四端 : 인의예지(仁義禮智))처럼 ‘단서’로 주어져 있어서 인간이 그것을 확충하면 커지고 그렇지 않으면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특성이다.

컵으로 다시 돌아가면, 칸트에게 물을 떠 마시는 컵이나 오무린 손바닥으로 만든 컵은 ‘감각’이며 그것은 개별성의 장소이다. 하지만 그것은 무엇인가를 떠서 마신다는 점에서 ‘컵이라는 개념’을 형성한다. 칸트에게 개념은 일반적 또는 보편적인 것이다. 칸트가 ‘직관’이라고 말하는 감성, 감각은 개별적 표상이며, 개별자들이 공통적으로 묶이는 것은 개념적 표상이다. 칸트는 이 두 표상을 이종적 표상이라고 생각했다. 직관은 생각하지 못하고, 지성은 직관하지 못하기에 “내용 없는 생각은 공허하고, 개념없는 직관은 맹목적”이라는 유명한 말이 나왔다.

칸트는 왜 어렵게 이종적 표상을 이야기했을까? 이종적 표상이 진리와 연관돼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 따르면 “진리는 인식과 그 대상의 일치”이다. 칸트에게 직관(감각, 감성)의 능력은 외부로부터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능력이며, 개념의 능력은 자발적인 표상 능력이다. 이종적인 표상이 결합될 때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직관적 표상 또는 경험적 표상의 연구는 철학의 일이 아니라 심리학의 일이라고 선을 그은 칸트는 순수한 표상의 진리가 확보될 수 있는지 말하는 것이야말로 철학의 일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지성적 사유의 순수한 규칙 또는 형식을 탐구하는 학문이 칸트가 말하는 ‘논리학’이다.


칸트에게 있어서 ‘순수’하다는 의미가 조금 보이기 시작했다. 칸트는 왜 ‘순수이성’이라고 했을까? 순수이성과 이성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 칸트가 말하는 선험적 표상은 경험으로부터 추상된 표상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그 원천을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 순수한 생각의 활동으로서 대상에 선험적으로 관계하는 개념을 탐색하는 지성을 연구하기 때문에 ‘순수’라는 수식어를 붙인 것이다. ‘선험론적’의 반대말은 ‘경험적’이다. 칸트가 바라보는 보편적 논리학은 인식들 상호간의 관계들 속에서 논리적 형식만을 고찰하므로 보편적 논리학은 ‘형식 논리학’이라고 부른다. 형식 논리학에서는 ‘타당성’이 중요하다.

김 교수가 형식논리학의 ‘타당성(validity)과 진실(truth)’ 개념을 설명하면서 든 예시가 재밌었다.

“한국을 A, 일본을 B, 미국을 C라고 했을 때,

한국은 일본보다 크다(A>B)
일본은 미국보다 크다(B>C)
따라서 한국은 미국보다 크다(A>C)

라고 주장한다면 이것은 ‘타당하다’(valid)고 말할 수 있지만 진실(truth)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칸트는 타당성과 진실성을 구분합니다.”

나는 칸트 철학의 문외한이기 때문에 김 교수가 설명하는 개념을 따라가기에 급급했다. 칸트의 기초 개념을 이해하고 이것이 인공지능과 어떤 관계가 있고, 칸트의 철학이 인공지능이라는 미지의 질문을 넘어가는 데 어떤 열쇠를 던져주는지 이해하기 위해서는 갈 길이 참 멀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마음과 인간의 생각이라는 것, 그리고 AI를 창조하는 인간의 지성은 ‘로고스’를 이해함으로써 밝은 시야를 가질 수 있고, 이것을 가지고 있어야 비로소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부정할 수 없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서양 문화의 정수를 제대로 맛본 것이 오늘의 성과였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