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눈처럼 뿌려진 고통, 어린 영혼의 속삭임이 들린다

[북 리뷰] 임철우의 『돌담에 속삭이는』(현대문학, 2019)

작은 것들의 신이 된 어린이의 입으로 부르는 추모곡

“4.3때 나무는 몇 그루나 불탔을까? 동물들은 몇 마리 죽었을까?”

예전에 한 시인과 제주4.3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다가 흘러나온 말이다. 나는 이 말을 듣고 영혼이 멈추는 것 같았다. 가끔 생각할 때도 멍하니 생각에 잠긴다. 그때는 피해자 명예회복과 진상규명, 그리고 구술 채록 작업이 한창이었기 때문에 자연을 돌볼 여력은 없었다.



▲ 책의 표지

몇 년 후 노형동 주민센터에서 어린이 희생자를 위한 추모제를 구경 갔다. 당시 공부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어린이들과 ‘잃어버린 마을’을 직접 탐방하다가 길을 잃고 헤맸던 기억도 난다. 한라대입구사거리 옆 파스쿠찌와 늘봄흑돼지 사잇길로 들어가서 끝내 잡초가 무성한 표지석을 찾았다. ‘넙은드르 잃어버린 마을 표지석’을 보고 나서야 이곳이 ‘광평마을’의 옛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공교롭게도 최근 내가 이사한 곳도 잃어버린 마을이 있는 광평마을이다.


임철우 소설 『돌담에 속삭이는』에는 어린이가 많이 나온다. ‘망월지폭낭할망당’이 있던 자리에서 엄마를 기다리다 토벌대가 지른 불에 타 죽은 여섯, 일곱, 여덟 살인 몽선 몽희 몽구 3남매는 영원히 어린이다. 주인공 한민우(주로 성만 붙여서 ‘한’이라고 호명하므로 이 글에서도 ‘한’이라고 부른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아버지를 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다. 어린이였던 한은 마당 구석에서 쓸쓸히, 제주어로 말하면 ‘기십이 폭싹 죽은’ 모습으로 논다. 마지막으로 한과 연결된 윤씨 노인은 몽희 삼남매와 어울렸던 이웃집 소녀 천엽이였다. 어린이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제주4.3 관련 작품 중에서도 특색이 있다.

그 동안 어린이와 관련된 작품이나 연구가 없었던 건 아니다. 생존자들의 구술을 증언을 토대로 4.3 당시 아동학살을 다룬 논문 <제주4·3 시기 아동학살 연구-생존자들의 구술을 중심으로>이 2007년에 발표되었고, 현기영의 자전적 소설 『지상의 숟가락 하나』는 2009년에 출간되었다. 이것을 청소년 판으로 개정한 책이 『똥깅이』다. 권윤덕의 그림책 『나무 도장』(2016)은 부모님의 비극적 과거를 알게 되는 과정을 다룬다. 그 외에도 제주4.3을 다룬 그림책은 해마다 늘고 있다. 제주4·3평화공원 내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각명비에 수록된 10세 미만의 아동 학살 피해자 800여명을 추모한 영화 <폭낭의 아이들>이 2022년에 상영되었으니 다양한 장르에서 제주4.3과 어린이가 조명되고 있다.

『돌담에 속삭이는』몽희라는 어린 영혼이 제2화자로 등장하며 본격적으로 어린이의 사정을 다룬다. 『돌담에 속삭이는』에는 어린이의 수난이 매우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묘사되는데, 예를 들면 소개령 한가운데에서 목숨을 위협당하던 숨 막히는 순간이 그렇다.

천엽은 식구들 몰래 담을 넘어 춘하네 마당으로 내려섰다. 헛간 거적문을 들쳐 올리는 순간, 뭔가를 입에 넣고 우물거리던 몽희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헛간 안엔 땔나무며 보릿대 다발, 멍석 따위가 어수선하게 쟁여져 있었다. 천엽은 아이들의 몰골에 놀랐다. 며칠 사이에 셋은 숫제 거지꼴로 변해 있었다. 퀭해진 눈에 얼굴은 땟국으로 새까맣고, 몸에 걸친 홑겹 옷은 걸레쪽처럼 너덜너덜했다.
“언니야…… 어른들한테 말 안 할 거지, 응?”
(152~153)


천엽(賤葉)은 ‘천한 이파리’라는 뜻으로 극심한 영아 사망률을 피해보려는 민간 신앙의 흔적이다. 몽희 삼남매는 어른들에게 속아서 용천포로 갔다가 그게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힘겹게 다시 춘하네 집으로 돌아온 것이다. 두 어른으로부터 이중의 학대를 받은 어린이의 모습이 제주4.3의 처참함을 더욱 도드라지게 만든다. 몽희의 엄마는 겁탈당한 후 학살당했지만 어른들은 엄마가 용천포에 계시다고 거짓말을 한다.

어느 시대마다 어린이들에게 ‘쥐약’ 같은 어른이 존재한다. 그들을 만나면 어린이들은 땅꾼을 만난 뱀처럼 아무런 힘을 못 쓴다. 예컨대 토벌대가 학살 이후 시신들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고통에 몸부림치는 갓난아기를 보면서 “이 XX 아직 안 죽었네.”라고 하면서 확인 사살을 하는 기록이 있다. ‘빨갱이의 피는 빨갱이’라는 논리로 어린이를 살해하는 것이다. 어린이 ‘적대적인’ 어른에게만 고통받는 게 아니다.


『돌담에 속삭이는』에서 몽희 삼남매는 천엽 아버지에게 속아서 용천포까지 갔다 온다. 천엽이 소개령으로 어지러운 순간 이웃 춘하네 집에서 삼남매를 발견하기까지의 여정이 소설에서는 생략되어 있지만 죽을 고생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나마 천엽의 아버지가 양심의 가책으로 평생 알코올중독에 시달리고 삼남매의 시신을 수습해 준 것이 달랐지만 어린이에게 재난은 이중 삼중의 고통이라는 사실을 『돌담에 속삭이는』은 강렬하게 묘사했다. 15세 이하 어린이들이 간다는 ‘서천꽃밭’을 ‘서천꽃밭섬’이라는 가공의 공간을 만들어서 위로하는 상상력은 이 책이 어린이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곡을 완성한다.

『돌담에 속삭이는』은 바라보고 이해하는 소설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삼 남매는 마지막 순간까지 엄마를 기다린다. 엄마는 반드시 돌아온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돌아온다는 약속은 이 소설에서 가장 독특하고 흥미로운 대목이며 독자가 예상치 못한 반전을 제공한다. 독자를 ‘낚시’에 빠뜨리는 일명 ‘미스디렉션(Misdirection)’이 담겨 있다. 결국 엄마와 삼 남매의 만남은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작별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엄마의 기도를 들어주며 삼남매를 점지해준 ‘망월지폭낭할망당’은 죽은 아이들을 품에 감싸고 엄마를 기다릴 수 있게 해주었으며, 가족의 만남을 주선해주었고, 한이 이 과정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제주 신화가 자연스럽게 녹아든 것도 이 작품의 특색이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걸 보는 특별한 눈의 정체


돌담에 속삭이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귀를 기울여야 한다. 요즘 같이 바쁜 시대에 돌담에 누가 눈길을 줄 리가 없다. 나는 눈이 애매하게 왔던 어느 겨울 싸리눈이 돌담 밑이나 처마 밑에 모여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것을 고통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마당에 떨어진 눈들은 금방 녹아 없어지거나 흩어져 버리지만 돌담 아래 쌓인 눈들은 오랫동안 녹지 않는다. 나는 『돌담에 속삭이는』이 바로 고통 받은 사람들이 돌담 아래 모여서 서로의 고통을 만져주는 이야기로 보았다.


▲ 의귀리에서 집단 희생된 주민을 모신 현의합장묘(사진=장태욱)

한이 어떻게 돌담이 잘 보이는 집에 오게 되었는지, 돌담 속에서 목소리를 듣고 어릴 적에 보았던 환영을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이해하려면 그가 어떤 고통을 당해 왔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퇴직 교사 출신인 한은 퇴직 말년에 극심한 고통으로 직업에 대한 본질적인 회의감이 들었다. “캄캄한 맨홀에 갇혀 질식해 죽기 직전의 순간과 대면한 느낌”(25)은 천식과 심장병으로 도졌다. 한의 제주행은 일종의 요양이었던 셈이다.

아버지가 보도연맹 사건으로 수장당했을 때 한은 엄마의 뱃속에 있었다. 한은 유년 시절 어머니를 잃었다. 유년기의 소년은 늘 혼자 외따로 떨어져 있었고, 추운 겨울날 마당가 돌담에 기대서서 손끝을 물어뜯고 있거나, 여름 해안변에서 홀로 떨어져 아이들이 물놀이하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픔을 간직한 사람에게 있는 ‘특별한 눈’을 감고 있었던 한은 돌담에 속삭이는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특별한 눈을 뜬 한은 돌담에 속삭이는 소리와 혼불의 정체를 알기 위해서 마을도서관을 들락거리며 비밀에 다가간다. 하지만 비밀은 전혀 뜻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통해서 실마리를 잡는다.

“우리는 서로가 똑같은 ‘아파하는 마음들’이구나. 그러기에 당신 또한 오래도록 온전히 잠들지 못하고 살아왔구나… 그러니까 바로 그날부터였어. 우리가 당신의 집을 유심히 지켜보기 시작한 것은.”

고통은 겨울에 내리는 눈처럼 온 세상에 뿌려진다. 하지만 고통을 지속적으로 받는 사람들은 돌담 모퉁이, 집 벽 모퉁이에 있는 사람들이다. 사람뿐 아니라 동물이나 식물도 마찬가지다. 약하고, 가난하고, 아프고, 어린 존재들의 고통을 헤아리는 사람만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살 수 있다.

정치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 사법부에 대한 분노가 만연한 까닭은 돈 있고, 힘 있고, 윗자리에 앉은 자들이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어루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남들이 못 보는 특별한 눈과 귀를 갖고 싶다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고 싶다면 가장 약한 존재들의 고통을 노래한 『돌담에 속삭이는』이 속삭이는 소리에 한 번 귀를 기울이는 게 어떨까?

오승주 
제주 성산포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어촌 소년처럼 10년간 사춘기, 놈팽이로 살다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특히 동양철학을 좋아해 서당에 다녔고 공자를 지적으로 스토킹했다. 초등학생, 중학생들을 지속적으로 만나 왔다. 제주4.3과 제주신화에 관심이 많은 소설가 지망생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