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기독교와 목회자를 이렇게 만들었나?

[북 리뷰] 윤정란의『한국전쟁과 기독교』(한울, 2015)

교회 때문에 세상이 어지럽다. 특히, 윤석열 일당이 내란을 시도한 지난 연말부터 탄핵정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지난 설 명절 전에 기독교 단체가 주최한 집회에서 서울 금란교회의 김 아무개 목사는 연단에서 “정치계, 법조계, 언론계 연예계, 교육계, 노동계, 종교계 등 사회 각계에 걸쳐 공산주의 바이러스에 가염됐다.”고 말했다.

목사가 이런 비현실적이고 광기어린 발언을 공개적으로 내뱉는 게 드믄 일은 아니다. 다만, 세상의 모든 현상에는 원인이 있는 법. 저들의 정신세계가 21세기 문명사회와는 어울리지 않게 병들고 도태된 원인이 어디에 있을까?

씁쓸한 의문에 답을 줄만한 책을 찾았다. 윤정란이 2015년 발표한 『한국전쟁과 기독교』인데, 19세기 후반 기독교를 일찍 받아들인 한반도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의 활동을 분석하는 책이다.


▲ 책의 표지
저자는 한국 사회의 보수 반공주의를 대표하는 핵심 집단은 기독교회라고 상정했다. 그리고 이들이 해방이후 월남한 서북지역 교인들이 분단과 한국전쟁을 거쳐 박정희 정권이 성립하는 과정에서 권력의 핵심을 장악한 점에 주목했다.

■ 한반도 서북지역의 특수성과 기독교

한반도의 서북지역은 평안도와 황해도, 함경도를 포함하는데 그 중심지는 평양이었다. 이 지역은 조선시대 이후 정치적 변방의 지위에 있었는데, 지역민들은 일찍이 상업에 관심을 두고 청과 무역업으로 자산을 축적했다. 이들은 조선의 유교 제도 대신에 기독교를 적극 받아들였다. 1938년 통계에 따르면, 조선의 기독교인 가운데 서북지역 신도가 75%를 달할 정도였다.

이 지역 기독교인들은 독립협회 창설에도 동참했고, 고종의 공격으로 독립협회는 해산되자 인재양성을 위해 학교를 세우는 일에 나섰다. 1907 고종이 강제 퇴위되자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은 서북학회를 결성하고, 안창호를 구심으로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3.1운동에도 주도적으로 나섰다. 3.1운동은 실패로 돌아갔지만. 이들은 자신감을 얻고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했다.

■ 해방 이후 소련군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기독교인들

1945년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되자 서북지역 기독교인은 자치기구를 만드는 일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소련의 탄압이 가시화되자 공산주의자, 소련군 사령부에 맞서기 위해 정당을 조직했는데,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조만식은 조선민주당을 결성했다.

소련군 사령부와 김일성은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단행해 지주제를 해체했다. 기독교인들은 경제적 기반을 잃었다. 기독교인과 공산주의자의 충돌이 잦았고, 기독교인들의 탈출이 시작됐다. 한경직은 일찍이 삼팔선을 넘었고, 조만식은 공산주의자에 저항하다 체포되어 연금됐다.

이들은 남한에 피난민 교회를 세웠는데, 특히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를 중심으로 강한 연대를 구축했다. 월남 목사 20여 명이 모여 이북신도대표회의를 결성하고 한경직을 초대 회장으로 선출했다. 이북신도대표회의는 미국에서도 파견된 선교사를 통해 기독교계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했다. 미국 선교사들은 선교자금과 구호물자를 독점했는데, 본국에서 온 지원금으로 한국 내에 자신들의 지위를 구축해야 할 상황이었다. 미국 선교사와 서북지역 기독교들과 이해가 잘 맞았다.

한경직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부와 교섭해 교회 설립자금, 학교 설립비 등을 지원받았다. 그리고 야간대학 설립비, 장로회신학교 복구비, 월남한 학생을 위한 학사 설치비, 청소년 지도비 등을 요구했다. 이북신도대표회는 이런 돈을 산하 교회에 배분하면서 개교회를 통제할 힘을 가지게 됐다.

■ 전쟁고아를 통한 민간 외교

한국전쟁에서 수많은 민간인이 희생됐고, 많은 전정고아를 양산했다. 1953년 12월, 전국의 고아는 6만 명으로 추산됐다. 전쟁고아가 범죄에 이용되는 등 사회문제로 부각됐고, 정부로서는 전쟁고아를 돌보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그런데 전쟁고아가 한미 혈맹의 상징물로 재발견됐다. 전쟁 기간 미군부대 주변으로 많은 전쟁고아가 몰려들었다. 미국은 한국에 구원자로서 미군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민군들에게 잠시나마 전쟁고아를 돌보는 것을 장려했다. 미군들은 고아들을 데리고 다니거나 고아원을 설립해 아이들을 돌봤다.


▲ 선명회  어린이합창단 귀국 환영식(정부 사진집)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미국정부는 소련에 대항해 아시아에서 미국의 가치를 선전해줄 민간단체가 필요해졌다. 이때 적합하다고 인정된 세력이 미국 복음주의자들이다. 복음주의자들은 미국 정부 정책에 부응해 한국의 전쟁고아를 돌보는 사업에 나섰는데, 그 일을 수행한 대표적인 단체가 월드비전과 기독교아동복지회, 홀트 입양프로그램 등이다. 이들 단체는 결연 사업과 입양 사업으로 한국의 전쟁고아를 지원했다. 서북출신 기독교인을 대표하는 한경직은 월드비전과 기독교아동복지회, 홀트 입양프로그램의 이사장과 이사 등을 역임하며 사업의 정책을 주도했다.

1961년,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미국 정부와 미국인들은 박정희가 과거 남로당에서 활동한 전력 때문에 의심의 눈을 거두지 못했다. 박정희로서는 미국의 지지를 얻는 일이 절박해졌는데, 이 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게 한경직이었다.

한경직은 1961년 10월, 고아들로 구성된 선명회 어린이합장단(월드비전 소속)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리고 7개월 동안 미국 전역을 돌며 순회공연을 펼쳤다. 공연은 성공적이었고, 합창단은 미국인들의 인기를 한 몸에 사로잡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박정희는 워싱턴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의 인정을 받았다. 선명회 어린이합창단은 ‘꼬마 친선 외교사절’로 역할을 톡톡히 해냈고, 박정희는 합창단을 꾸준히 지원했다.


▲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정부 사진집)

■ 서북청년회

서북지역 기독교인들이 남한 내 반공의 보루 역할을 설명할 때, 서북청년회의 역할을 빼놓을 수 없다.

서북청년회는 한경직이 세운 영락교회 청년들을 중심으로 서북지역 출신들이 결성한 우익 청년단체다. 서북청년회는 1946년 11월 30일에 결성할 때, 스스로 안창호, 이승훈, 조만식 등 서북지역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의 애국적 민족운동을 계승하는 점을 강조했다. 김구와 이승만 등 민족진영 지도자들은 서북청년회를 적극 지지했다.

당시 한경직은 월남 기독교인들이 남한에 정착할 수 있도록 해방촌을 주선했다. 거기에 자리 잡은 청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생활했고, 서북청년단에 가입했다. 서북청년회는 처음 세력 확대를 위해 전국에 지부를 결성하고, 대북한 공작, 좌익 소탕 활동을 벌였다. 그리고 삼팔선을 넘어 이북에서 지하조직을 강화하기도 했고, 미군을 위한 첩보를 수집하기도 했다.

서북청년회는 회원들을 지역에 파견해 좌익 소탕활동도 전개했다. 좌익이 만든 조선조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 소속 노동조합을 파괴하고 전평을 대신해 대한노동총연맹을 조직했다. 제주4·3에서는 양민학살이 절정에 달했다.

서북청년회는 1947년 3월 1일 이후 총 세 차례에 걸쳐 제주도에 파견됐다. 제주4·3이 발발하기 전까지 760명이 제주도에 상주했다. 1948년 11월 17일에 제주도에 계엄령이 선포되자 그해 12월에 서북청년회로 구성된 특별중대가 2연대에 주둔했다. 그리고 그해 11월 중순부터 이듬해 3월까지 주민을 무차벌 학살한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승만이 1949년 12월에 우익단체를 통합해 대한청년단을 발족하면서 서북청년회는 해산의 길을 걸었다. 서북출신 대부분은 이승만의 견제로 정치권에서 배제됐다. 그런 상황에서 박정희가 5.16 군사 쿠데타를 일으켰다. 서북청년회 출신 인사들은 이 사건을 계기로 화려하게 부활했다,

5.16 군사 쿠데타의 중심에는 조선경비사관학교 5기와 7기, 8기, 9기로 입학한 서북 출신들이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쿠데타 이후 브레인으로 군사 정부에 참여했고, 이후 박정희 정권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서북청년회 출신들은 반공주의를 기반을 박정희 정권과 강하게 결합해 한국의 정계에서 핵심적 지위를 부여받았다.

앞서 기술한 대로 한국의 서북지역은 봉건제를 타파하고 서구식 자유주의를 도입하는 일에 앞장선 지역이다. 그런데 광복과 한국전쟁, 군사정부를 거치면서, 이 지역 출신들은 한국의 반공주의를 책임지는 도구로서 추락했다. 윤석열 일당이 일으킨 내란과 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일부 기독교인들이 보인 행태에서 한국의 기독교에 뿌리박힌 광기어린 반공주의를 여실히 드러냈다.

그 광기의 출발이 100여전 전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선진문물을 받아들인 서북지역이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이들의 언어와 행동은 이들을 지배하는 정신에 깔린 증오의 토양을 잘 보여준다. 거기에 예수의 복음이 싹틀 자양분이 있을까? 한국의 기독교를 이토록 천하게 만든 세계 냉전질서와 우리 역사가 원망스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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