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에 흔들리는 시대, ‘비로소 내가 어디 있는지 알았다’
[북 리뷰]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Homage to Catalonia)』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서 내란이 발생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유분수지 멀쩡한 세상에 집권세력 일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국회와 시민의 현명한 대응으로 비상계엄은 막아냈지만, 사회는 그 여진 속에 있다.
스페인은 우리보다 지독한 내란을 겪었고, 인민은 처참한 결과를 받았다. 1936년 7월 17일,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프랑코 장군이 좌파연합인 인민전선 정부에 반기를 들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내란은 좌파 인민전선(혹은 공화파) 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우파 쿠데타군 사이에 내전으로 이어졌다.
■스페인내전과 조지 오웰
반란을 일으킨 프랑코 장군은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그를 지지하는 그룹이란 일부 대기업,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층, 부패한 교회뿐이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연대했고, 내전에서 승리하는 지역에서 이들은 민병대와 경찰력을 이용해 공장을 장악하고 정부를 대신했다. 카탈로니아의 주도 바르셀로나는 노동자가 장악한 대표적인 도시였다.
조지 오웰은 공화파의 편 민병대 소속으로 참전해 1936년 12월부터 1937년 6월까지 7개월 동안 의용군으로 복무했다. 귀국 후 그 경험을 르포로 남겼는데, 그게『카탈루냐 찬가(Homage to Catalonia)』다. 책은 1938년에 출판됐는데, 책이 나올 때까지도 오웰은 전쟁의 결과는 알지 못했다.
책은 오웰이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하면서 시작된다. POUM(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의 일원이 되어 기본 훈련을 받았다.
■혁명 열기는 뜨겁지만 오합지졸에 물자 부족인 민병대
당시 바르셀로나는 무정부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당원 대부분은 노동자였다. 도시는 활기가 넘쳤고, 큰 건물마다 검은색이 섞인 깃발이 걸려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가 평등했다. 손님과 웨이터가 평등했고, 군대에서도 장교와 사병이 평등했다. 생활에 필요한 물자는 부족했지만, 혁명에 대한 믿음, 자유에 대한 믿으므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오웰은 레닌병영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군대는 오합지졸이었다. 제복과 모포가 부족해 추위를 견딜 수 없었다. 10대 소년들이 신병 대부분이었다.
1937년 봄, 알쿠 베이레 전선으로 출발했다. 전장에는 배설물과 음식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 겨우 소총이 지급됐는데 1890년대 독일에서 제작된 것이었다. 적보다 추위가 두려웠다. 영국에서 전장에 파견된 병사들에게 위문품을 보냈지만, 한 번도 제대로 도착한 적이 없었다. 병사들 몸에는 이가 들끓었다.
이곳에도 봄이 왔다. 농민들은 옛 지주의 땅을 직접 경작했다. 1937년 4월. 땅을 깊이 파 참호를 만들었다. 적의 기습공격을 받고 소년병 7명이 죽는 피해가 발생하기도 했고, 70명의 돌격대가 파시스트 진지에 침투해 적의 참호를 접수하기도 했다.
■휴가와 바르셀로나 시가전
전선에서 150일을 보낸 뒤 1937년 6월에 휴가를 얻었다. 바르셀로나에 돌아왔는데, 도시 전체가 이전과 크게 달라져 있었다. 민초들은 전쟁에 관심을 잃었고 빈부 상하의 계급 구분이라는 일반적인 사회 현상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르셀로나로 여행 온 아내를 만나 함께 휴가를 즐겼다.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담배, 샴페인을 마음껏 소비했다. 그러던 중 바르셀로나 시가전이 발생했다. 정부 치안대와 통일 노동자당 소속 노동자가 서로 총격전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오웰은 그 전투에 휘말렸다. 통일노동자당이나 공산당이나 모두 좌파 인민전선 정부의 구성원인데, 정부 소속 치안대가 통일노동자당과 전투를 벌인 건, 인민전선 내부에 균열이 생겼다는 걸 의미한다. 프랑코 군과 싸웠던 동지는 이제 서로 총을 겨누는 적으로 변해갔다.
정부가 통일노동자당을 불법으로 규정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공화정부 내에서 소련의 지원을 받던 공산주의자들(통일사회당)이 세가 약한 정당인 통일노동자당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이후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매체는 통일노동자당을 파시스트와 연합한 간첩세력이라고 비난했다. 통일노동자당원들에 대한 탄압과 구금이 이어졌다.
‘어쨌든 최종적인 결과는 이런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시점, 즉 시가전이 일어나고 나서 여섯 달 뒤 통일 노동자당의 지도부 대부분은 여전히 감옥에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재판을 받은 적이 없다. 무전으로 프랑코에게 연락했다는 등의 혐의는 단 한 번도 공식적으로 제기된 적이 없다.’ -p248
오웰은 바르셀로나 시가전이 끝나고 사흘 후 전장으로 돌아갔다. 거기에서 파시스트와 총격전이 발생했는데, 오웰은 총알이 목을 관통하는 부상을 입었다. 용케 목숨을 건지고 후방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바르셀로나로 이송됐다.
바르셀로나는 공산주의자들이 장악하고 있었고, 감옥은 죄인들로 북적였다. 신변에 위협을 느낀 오웰은 통일노동자당 의용군 신분증 말고 영국 여권과 병원 입원증으로 신분을 확인했다. 그렇게 요양소에서 치료를 받고 의미 없는 전장에서 빠져나올 결심을 한다. 오웰은 전투 부적격자 판정을 받고 전역했다. 영국 영사에게 도장을 받고 국경을 넘었고 프랑스를 거쳐 영국에 도착했다.
■ 스페인내전은 정치적 전쟁
오웰은 스페인에 처음 왔을 때, 그리고 그 후 얼마 동안도 정치적 상황에 대해 관심도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고 했다. 그런데 이 전쟁은 정치적인 전쟁이고 정당 내부의 투쟁을 파악하지 못하면 이 전쟁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왜 쓰는가』에선 ‘스페인내전의 결과는 런던, 파리, 로마, 베를린에서 결정됐다고 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파시스트 세력을 충분히 지원했는데, 영국과 프랑스는 공화파를 지원하지 않았다. 러시아가 공화파를 지원했다지만 너무나 인색하게 지원했다. 통일사회당을 앞세워 인민전선 정부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혁명세력을 분쇄하기까지 했다. 그 결과가 스페인 인민에게 패배를 프랑코에게 승리를 안겼다.
스페인내전에 참전한 경험은 이후 조지 오웰의 글쓰기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는 걸 짐작할 수 있는 구절이 『나는 왜 쓰는가』에 있다,
‘스페인내전과 1936~1937년에 있었던 그 밖의 사건들은 저울을 한쪽으로 기울게 했고, 그뒤부터 나는 내가 어디 서 있는지 알게 되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우리시대 같은 때에 이런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내가 보기엔 넌센스다.’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이후 발표한 작품이 소련의 스탈린 체제를 비난하는 『농물농장』(1945)과 전체주의를 비판하는 『1984』(1949) 등이다. 그의 말대로 전체주의를 경계하는 작품들이다.
다시 한국으로 눈을 돌리면, 여전히 종식되지 않은 내란사태. 우리가 1960년 4.19혁명과 1987년 6월 항쟁, 또 2016년 촛불항쟁을 거치며 겨우 쟁취한 공화주의가 바람에 흔들린다. 이런 위기 가운데 ‘정치적 주제를 피해 글을 쓸 수 있다는 건 넌센스’다. 조지 오웰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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