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주의가 판치는 세상, 법조문에만 기댈 때 민주주의는 무너진다

[북 리뷰] 스티븐 레비츠키 ‧ 대니얼 지블랫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어크로스, 2018)

2024년 12월 3일 밤 전국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다. 비상계엄을 경고하는 정치권의 주장이 있었지만 설마 21세기 대한민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고 믿는 사람들이 과연 몇이나 있었을까?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은 일어났고, 계엄 가능성을 염두에 두었던 의회의 신속한 대응과 시민들의 힘으로 불과 두 시간 반 만에 계엄은 해제되었다. 그날 밤, 의회와 시민들이 나라를 구했다.

친위쿠데타로 불러야 할 비상계엄 선포의 표면적 명분은 ‘반국가 세력 척결’이었다. 그것은 집권세력에 맞서는 모든 시민과 정당, 그 지지자들을 ‘반국가 세력’으로 규정하여 ‘처단’하고 영구집권을 획책한 사건이었다. 현 집권세력의 권력 사유화 욕망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쓴 것이다. 권력의 사전적 정의는 ‘남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거나 지배할 수 있는 공인된 힘’이다. 그날 밤 우리는 공인된 힘인 ‘권력’을 영원히 독점하고 싶다는 소수의 욕망 앞에, 견고하다고 믿었던 우리의 민주주의 제도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


▲ 책의 표지
하버드대 정치학과 교수 스티븐 레비츠키와 대니얼 지블랫의 책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는 2016년 트럼프 당선 이후 출판되었다. 저자들은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공직경험이 전혀 없고, 헌법이 보장한 기본권을 존중할 의지가 보이지 않는, 독단적 성향이 뚜렷한 인물이 대통령으로 선출”(p.7)된 이후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깊고 성공적으로 보였던 미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붕괴되고 있는지를 분석하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교훈을 제시한다. 2018년 출판되었던 이 책이 2024년 비상계엄 사태 이후 한국에서 다시 큰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거울처럼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핵심메시지는 민주주의가 쿠데타처럼 극적인 사건을 통해 순간적으로 무너지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국민이 선출한 지도자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는 윤석열이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후 이 두 가지 경우-내부로부터의 점진적 붕괴, 군대를 동원한 친위 쿠데타-를 동시에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책을 읽는 내내 우리나라의 최근 상황을 그대로 묘사한 건 아닌지 착각할 정도였다.

저자들은 민주주의 붕괴의 단초로서 민주주의자와 극단주의자의 치명적 동맹이 어떻게 잠재적 독재자에게 권력을 넘겨주는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브라질의 제툴리우 바르가스, 페루의 알베르토 후지모리, 베네주엘라의 우고 차베스와 같은 사례들이다. 아웃사이더 정치인들이 기존 정치인들과의 연합 또는 선거를 통해 합법적으로 권력을 잡은 후 그 선출된 권력으로 행한 독재의 결과가 얼마나 참혹했는지를 상기시킨다.

“기존 엘리트 집단은 인기 있는 아웃사이더를 받아들여도 얼마든지 ‘제어’할 수 있으며, 나중에 자신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믿는 치명적 실수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다.”(p.21)

우리의 현실에 대입해보자면 ‘강골 검사’ 윤석열은 살아있는 권력 박근혜 대통령을 수사해 탄핵을 이끌어내며 대중의 인기를 얻었다. 국민의힘은 자당의 권력 획득을 위해 그를 영입해 대통령 자리에 앉혔고 그의 폭주를 제어하지 못한 채 헌정질서를 파괴한 친위쿠데타에서 공범으로 전락한다. 정당정치를 근간으로 하는 민주주의 제도 안에서 정당이 민주주의의 문지기로서 극단적 아웃사이더를 걸러내는 역할을 하지 못해 참극이 벌어진 것이다.

‘집단적 포기’, 다시 말해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인물에게 권력을 넘기는 행동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째, 잠재적 독재자를 통제하거나 길들일 수 있다는 착각이다. 둘째, 사회학자 이반 에르마코프가 ‘이념적 공모’라고 부른 개념으로, 이는 집단적 포기를 택한 주류 정치인들의 이해관계가 독재자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는 경우에 해당한다.(p.86)

저자들은 잠재적인 독재자를 감별할 수 있는 네 가지 경고신호를 제시한다.

첫째, 말과 행동에서 민주주의의 규범을 거부한다. 권력을 잡기 위해 쿠데타나 폭동 등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선거불복 등 선거제도의 정당성을 부정한다. 둘째, 정치적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한다. 정치 경쟁자를 국가 전복세력이나 범죄 집단으로 몰고 적국과 내통하는 스파이라고 주장한다. 셋째,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한다. 정적에 대한 폭력행사를 부추기거나 지원하고 지지자들의 폭력행위를 정당화한다. 넷째, 언론의 자유를 포함하여 반대자의 기본권을 억압한다. 상대 정당, 시민단체, 언론에 법적대응을 통해 협박한다.


▲ 극단주의자들은 민주주의를 지탱하는 제도를 무력화하려 한다. 사진은 지난 2022년 지방선거 개표 현장이다. 최근에 극우주의자들은 선관위가 개표를 조작했다는 허무맹랑한 주장을 내놓고 있다.(사진=장태욱)

미국에서 트럼프 재임 중 벌어진 일이며 재선 실패 이후 보였던 행태였다. 또한 윤석열 정권에 이 네 가지 신호를 대입해 보자면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모두 해당된다. 급기야 군대를 동원해 의회를 무력화시키고 정치적 경쟁자와 반대자들을 법 밖에서 살해할 계획까지 세웠다는 사실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정당정치 경험 없이 사법의 칼날을 휘두르던 윤석열의 정치의식은 어떤 면에서 나치독일의 법학자 카를 슈미트가 폭력의 정당화를 위해 주장한 ‘주권’ 개념에 맞닿아 있다. 슈미트가 말하는 주권이란 ‘예외상태’(Ausnahmezustand - 독일어에서 ‘비상사태’나 ‘계엄’으로 번역될 수 있다.)를 선포할 수 있는 권력을 의미한다. 어떤 형태로든 법의 효력을 정지시킬 수 있는 주권자는 “타당한 법질서 외부에 있으며, 그럼에도 그러한 질서에 속해 있다. 왜냐하면 헌정을 전면 중단시켜야 할 것인지 결정할 권한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카를 슈미트, ⌜정치신학⌟, p.34) 카를 슈미트는 예외상태를 통해 모든 유형의 폭력을 권리에 포함시켰고, 이로써 "지도자는 법을 수호한다."는 히틀러 권력의 공식화를 이끌어냈다. 말하자면 어떤 합법적인 계엄사유도 없이, 오직 권력 유지만을 위해 헌정질서를 전면 중단시킨 윤석열의 정치의식은 히틀러의 그것과도 일맥상통한다. 히틀러는 강제수용소를 통해 전대미문의 전체주의 정치를 실현했다. 윤석열 역시 B1벙커로 상징되는 수용소 설치를 모색하며 영구독재를 꿈꾸었는지도 모른다.

민주주의 규범을 허무는 선동적 지도자와 위기를 느낀 기성정치 세력 사이에 고조되는 갈등의 결과로 민주주의는 붕괴한다.(p.99) 심판매수는 언제나 도움이 된다. 법원과 검찰, 정보기관, 국세청, 규제기관이 여기에 해당한다. 정권의 충신들이 이들 기관을 장악할 때 이러한 제도는 권력을 제어하기 위한 수사와 고발을 차단함으로써 잠재적 독재자에게 도움을 준다. 그러할 경우 대통령은 마음대로 법을 어기고, 시민권을 위협하고, 심지어 수사나 검열에 대한 걱정 없이 헌법을 위반한다. 그리고 정권의 입맛에 맞는 판사로 사법부를 채우고 법 집행기관의 힘을 무력화함으로써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권력을 휘두른다.(p.102)

이 대목은 윤석열 정권이 들어선 이후 일상적으로 보아왔던 익숙한 내용이다. 독재자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논리는 법의 안과 밖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이다. 잠재적 정적을 다루는 가장 쉬운 방법은 매수다. 그들은 잠재적 정적들에게 고위공직을 제공하거나 이권을 줌으로써 입을 틀어막는다. 반면 매수되지 않는 적들은 철저히 법 안에 위치시켜, 매수한 심판의 힘을 이용해 법으로 옭아매어 탄압한다. 그들은 또한 자신들의 반민주적인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경제위기나 자연재해, 전쟁과 폭동, 테러와 같은 안보위협을 구실로 삼는다. 불행히도 우리는 최악의 경우인 비상계엄 사태를 경험하고 있는 중이다.


▲ 1980년 5월, 광주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들이 거리에서 게엄해제를 요구하는 장면이다. 역사에서 민주주의는 시민의 피를 먹고 자랐다. 그런데 최근 극단주의자들이 내란을 시도해 민주주의가 흔들리고 있다.(사진=한국정책방송원)
저자들은 아무리 잘 설계된 헌법도 그 자체로 민주주의를 보장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법체계에 본질적으로 내포된 개념적 공백과 의미의 모호함 때문에 헌법조항에만 의존해서는 잠재적 독재자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미국의 정치적 전통 안에서 법체계의 느슨한 공백을 메우며 민주주의를 지키는 가드레일 역할을 해온 핵심적 규범 두 가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는 저자들이 제시하는 민주주의 수호를 위한 해법이기도 하다.


비록 성문화 되지 않은 규범이지만 법체계의 공백을 메우는 규범으로 ‘상호 관용’과 ‘제도적 자제’가 그것이다. 상호관용이란 자신과 다른 의견도 인정하는 정치인들의 집단의지를 뜻한다.(p.133) 제도적 자제란 지속적인 자기통제, 절제와 인내, 혹은 법적 권리를 신중하게 행사하는 태도를 뜻한다.(p.137)

저자들은 20세기에 들면서 이러한 암묵적 정치규범들이 무너지며 정치적 경쟁 집단의 분열과 극단화가 나타났다고 주장하는데 그 배경으로 미국 유권자 집단의 성격변화를 언급한다. 20세기 냉전시대 이후의 정당 정체성 기준은 보수와 진보의 이념적 가치를 대변하는 것이었다. 반면 21세기 이후의 정당은 사회적, 민족적, 문화적 특성의 변화에 따라 서로 다른 공동체 문화와 가치를 대변하는 집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공화당의 핵심지지층인 백인 개신교집단은 200년 가까이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으로 미국사회에서 우월한 위치를 누렸다. 그러나 그들은 어느 순간 다수의 우월적 지위를 잃고 공화당 안에만 갇힌 소수가 된다. 한국의 유권자 집단 역시 한국전쟁 이후의 이념적 가치 기준을 벗어나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세대, 빈부격차와 같은 사회적, 문화적, 계층적 가치를 기준으로 정당 지지층의 재편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현재 한국 정당정치의 현실은 지지층의 가치를 정책적으로 대변하고 구현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어 보인다.

1964년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는 ‘지위불안’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집단의 사회 지위, 정체성, 소속감이 위협받고 있다고 인식될 때 “미국 정치의 편집증적 성향”이 나타나고, 이는 결국 “과열되고, 상대를 지나치게 의심하고, 과도하게 공격적이고, 극단적이고, 종말론적인” 정치 접근방식으로 이어지게 된다고 주장했다.(p.218)

정당정치가 양극화된 사회에서 경쟁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정치를 전쟁으로 인식하는 입장은 강성지지층을 결집시키는 효과적 전략이다. 현재 한국 사회의 현상들은 이를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과 국민의힘은 자신들의 지지층이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지위불안을 부추기며 거짓을 선동한다. 심지어 극우 보수 개신교 세력을 암묵적으로 지지하거나 후원해 법원을 습격, 폭동을 일으키는 등 맹목적 지지와 폭력을 유도했으며 아직 그 불씨는 살아있는 듯하다.

현 집권세력은 이념대립의 망령을 소환하여 극단적 혐오와 광기를 조장함으로써 권력유지를 위한 진흙탕 싸움을 시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 한쪽이 규범을 무너뜨리고 진흙탕 싸움을 시도할 때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해야 할까? 저자들은 그러한 대응전략은 전제주의 출현의 가능성을 높인다는 사실을 경고한다. 즉, 야당이 진흙탕 싸움에 뛰어들 때 정부는 이들을 탄압하기 위한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한다는 것이다.(p.272) 가능하다면 민주주의 제도를 기반으로 의회와 법원, 선거를 통해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항의 목표는 권리와 제도를 뒤엎는 것이 아니라 지키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법과 제도, 규범 안에서 싸울 때에만 정당성은 확보된다. 우리가 분노를 억누르며 계엄 이후 석 달째 의회와 헌법재판소를 통해 치러지는 길고, 지루하고, 답답한 싸움을 숨죽여 지켜보는 이유이기도 하다.

미국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문제를 극단적 당파분열로 본 저자들은 이러한 정치양극화 해소를 위한 해법으로 엘리트 집단 간의 협력과 타협을 권고한다. 이상적이고 상식적인 해답이다. 더불어 양극화를 고착시키는 요인인 인종적, 종교적 재편과 점점 심각해지는 경제 불평등이라는 근본적 문제해결을 위해 정당이 대변하는 대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집단적 과제로 민주주의를 지탱해온 규범과 불문율을 만들어내고 지켜내는 일일 것이다. 민주주의 제도를 실행하는 도구인 정당은 권력쟁취를 위한 이념적 가치추구가 아니라 국민의 일상적이고 평화로운 삶을 보장하기 위해 각 계층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아차리고 사회적 적대감과 갈등을 해소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그 운명은 우리 모두의 손에 달려 있다.(p.288)

우리가 아는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불완전한 인간이 시련을 겪으며 성숙해 가듯이 민주주의란 제도 역시 위기를 통해 성숙해 갈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 미친 ‘者’들의 친위쿠데타 사태를 겪으며 다시 한 번 스스로 묻게 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병욱
가톨릭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SBS에서 방송작가로 활동하다 제주MBC에서 음악방송을 제작 진행했다. 지금은 제주농산물을 가공하는 중소기업을 운영 중이며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에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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