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게 진짜라는 미친 전도(顚倒), 서양문명의 기초”

도민대학 ‘『순수이성비판』읽기’ 2강좌 2일 저녁, 열려

‘제주에서 『순수이성비판』읽기’ 2차시 강좌가 2일 저녁, 서귀포 복합문화공간 라바르에서 열렸다. 이날 주제는 ‘플라톤의 이데아와 칸트의 아프리오리 사이에서’이다. 저녁 7시에 시작한 강의가 10시까지 이어졌는데, 자리를 떠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만큼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 늦은 시각까지 강의가 이어졌다. 한 사람도 자리를 뜨지 않을 만큼 진지한 분위기가 이어졌다.(사진=장태욱)

플라톤과 칸트는 2000년 가까운 시간차에도 불구하고 공통적으로 인간이 경험으로부터 독립해 사물을 파악하는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플라톤은 현상 너머에 존재하는 선험적 원형의 세계인 이데아가 존재한다고 봤다. 반면, 칸트는 순수 지성과 순수 이성의 활동을 통해 선험적 인식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아프리오리’는 선험적 인식과 상통하는 단어다.

김상봉 교수는 이날 ‘형이상학’을 화두로 강의를 시작했다. 삶을 여행길에 비교한다면 형이상학은 전체 지도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헤겔이 독일인에 대해 ‘형이상학 없이 개화한 민족’이라고 한탄한 점을 언급한 뒤 “한국인이야 말로 형이상학 없이 개화한 민족”이이라고 한탄했다. 그리고 “철학적으로 자기 집을 짓지 못하는 사람은 정신의 셋방살이를 면하지 못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 김상봉 교수는 강의 도중 철학이 부족하고 형이상학에 무관심한 한국사회를 질타했다.(사진=장태욱)

‘경쾌한 비둘기는 자유로운 날개짓으로 공기를 가르면서 공기의 저항을 느끼고, 공기 없는 진공에서 훨씬 더 잘 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바로 그런 이유로 플라톤은 감각세계가 지성에게 온갖 장애물을 너무도 많이 설치하므로 그 세계를 떠나 이데아의 날개를 타고 감각 세계의 피안에 있는 순수한 지성의 진공 속으로 과감하게 날아갔다. 하지만, 그는 그 진공 속에는 자기가 아무리 애를 써도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으니 진공 속에는 지성을 그 자리로부터 움직이기 위해 딛고 서서 힘을 가할 발판이 될 만한 아무런 저항물도 없기 때문이다.’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칸트가 플라톤의 이데아를 비판하는 대목이다. 칸트는 플라톤이 현실의 장벽을 제거하기 위해 이데아의 세계로 도피했다고 비판했다. 그리고 진공과도 같은 지성적 세계에서 사유는 현실에 대한 인식이 아니라 개념 분석에 몰입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칸트의 이 지적에 대해 김상봉 교수는 “칸트의 지적은 잘못됐다. 칸트가 실수한 것이다.”라며 “우리가 플라톤의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하면 칸트의 위대함 또한 이해할 수 없다.”라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플라톤의 이데아는 ‘물질을 지배하는 정신의 세계’라고 언급한 뒤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 본 모든 세계는 불안정한 것이고 그림자와 같은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는 ‘서양문명은 물질문명, 동양문명은 정신문명’이라는 말을 귀가 닳도록 들었는데, 플라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진짜라고 했다.”라며 “이 미친 전도(顚倒)가 서양문명의 기초가 됐다.”라고 말했다.


▲ 진희종 원장은 철학에서 보면  서귀포시는 사막에 불과하다며, 강좌에 모인 사람들은 사막에 나무 한 그루씩 심는 것이라고 말했다.(사진=장태욱)

또, “보이는 모든 것은 정신의 외화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3천년을 살았다.”라며 “우리는 입에 들어오는 것만 진짜인줄 안다. 오늘도 TV에 ‘먹방’이 방송된다.”라며 이데아를 통해 정신의 기초를 다진 플라톤의 위대함, 또 그걸 모르는 한국사회의 무지를 진단했다.

김상봉 교수는 정신의 세계에 관심이 없고, 형이상학에 무지한 한국사회의 풍토를 비판하면서도 가능성에 여지 또한 남겨뒀다.

김 교수는 “우리말로 철학을 해본 역사가 짧기 때문에 우리말의 고유한 울림을 반추할 기회가 없었고, 그 결과 우리말로 세상을 바라보는데 익숙하지 않다.”라며 아쉬움을 표했다. 그러면서도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했던 하이데거의 말을 인용한 뒤, 우리말의 고유성에 더해 우리가 겪었던 처절한 역사가 우리시대 철학의 희망이라고 진단했다.

강좌를 마련한 제주평생교육장학진흥 진희종 원장은 “대학이 사라져버린 이후 철학에서 보면 서귀포는 사막과도 같은 곳이다. 이 강좌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사막에 나무 한 그루씩 심는 것이다.”라며 “김상봉 교수가 이 강의를 준비하면서 원서를 번역하며 교재를 만들었다. 매우 헌신적으로 강의를 준비했다.”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