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픈 시절을 기억하는 꽃, 하얗게 웃는다

[주말엔 꽃] 감자꽃

늦게 파종한 감자밭에 꽃이 하얗게 피었다. 하얀 꽃이 고고하게 고개를 들었고, 하늘을 향해 함박웃음을 짓는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했지만, 감자꽃 하얀 웃음은 한 달 동안 이어진다. 그 웃음이 그칠 무렵 줄기가 시들면, 감자 열매가 영글어 수확을 기다린다.

19세기는 지구가 소빙하기에 접어든 시기여서 기근은 일상화됐는데, 조선의 기강이 해이해서 가렴주구마저 극심했다. 배고픈 백성은 먹을 것을 찾아 만주로 떠나거나 농기구 대신 창을 들고 민란에 가담했다. 그 격변의 시대에 드라마틱하게 이 땅에 감자가 들어왔다. 감자가 이 땅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은 이유다.


▲ 감자밭에 하얗게 핀 꽃(사진=장태욱)

모두가 알다시피 감자는 남미 안데스산맥에 자생하던 것인데,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유럽에 소개됐다. 그리고 다시 19세기 후반에 중국에 전해졌고, 중국에서 50년가량 머무른 후 조선 땅에 들어왔다.

중국인들은 감자에 대한 관심이 미지근했다. 중국은 대체로 토양이 비옥해서 곡식이 풍부했고, 감자에 앞서 고구마가 도입됐기에 배고픔을 해결할 작물이 있었다. 게다가 감자는 맛에서도 고구마에 미치지 못했다.

그런데 조선은 중국과 달랐다. 가렴주구와 기근에 시달리던 백성에게 식량은 너무나 절박했다. 감자가 조선 땅에 도입된 과정을 소개한 문서가 여럿 존재하는데, 이는 감자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뜨거웠다는 증거다.

기록에 감자가 등장하는 것은 서유구가 쓴 「행포지」(杏蒲志, 1825)가 처음이다. 당시 기록에는 감자를 ‘북저(北藷)’라고 하여 근래 관북지방에 전해졌다고 짤막하게 소개했다. 관북지방은 지금 강원도의 북쪽 지역이다.

조성묵이라는 선비가 작성한 「원서방」(圓薯方, 1832)에도 감자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만주 영고탑(寧古塔)의 감자가 1823년 북관개시를 통해 관북지방에 처음 전해졌다고 한다. 영고탑은 중국 흑룡강성 영안(寧安)시에 있는 국제무역 시장인데, 영고탑 상인들은 함경도 회령에서 조선 상인들과 거래했다. 그 거래 과정에서 감자가 도입됐다는 설명이다.


▲ 제주도에서 자란 싱싱한 봄감자가 시장에 나왔다.(사진=장태욱)

이규경이 1850년대에 집필한 백과사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감자가 조선에 전래되는 과정과 관련해 흥미로운 내용이 담겼다. 만주에 거주하던 심마니가 조선 함경도 지방으로 들어와 초막을 짓고 살면서 감자를 재배했는데, 돌아갈 때 이를 두고 갔다는 내용이다. 조선 농부들이 이를 신기하게 여겨 재배했는데, 이게 조선에 감자가 도입된 과정이라고 했다.

이규경은 당시 함경도 무산지방의 수령 이형재의 노력으로 감자가 멀리 전파됐다는 내용도 있다. 이형재는 당시 농민들이 감자를 재배한다는 소문을 듣고 농가를 직접 찾아가 감자를 구했다. 감자를 내주지 않는 농민에겐 소금을 내주고 거래하는 방식으로 감자를 얻었고, 씨감자와 재배법을 널리 보급했다.

제주도에선 육지부와 달리 감자를 ‘지슬’이라 부른다. 이는 앞서 도입된 고구마와 관련이 있다. 고구마가 제주도에 들어올 때, 사람들을 이것을 ‘감져’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후 감자가 들어오니 이름을 구분할 필요가 있었고, 그래서 만들어낸 이름이 지실(地實)이다. 지실이 변형돼서 지슬이 됐다. 오멸 감독의 영화를 통해 ‘지슬’은 제주4.3 당시 생존이 위태롭던 제주 민초의 운명을 상징하는 이름이 됐다.


▲ 우리 텃밭에 꽃을 피운 감자(사진=장태욱)

농림축산식품부와 농촌진흥청, 한국감자연구회가 20일, 강원도 강릉에서 조선에 감자가 전래된 지 2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한 행사도 개최했다. 이날, 6월 21일을 ‘감자의 날’로 알리는 선포식도 개최했다. 6월 21일은 절기상 하지(夏至)로, 이 무렵 갓 수확한 봄 감자를 맛볼 수도 있고, 수확기가 늦은 고랭지 감자밭에는 감자꽃이 활짝 피는 점에 착안했다.

시장에 제주도에서 재배한 싱싱한 봄감자가 나왔다.  텃밭엔 늦게 심은 감자가 지금 꽃을 피웠다. 그런데 감자 주산지 제주도가 너무 조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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