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 금백조의 차남, 먼 대정에 자리 잡은 이유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④] 대정현 광정당

봄의 마지막 절기 곡우(穀雨)다. 이때 내린 비는 한 해 농사를 결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하늘에서 내리는 곡식비, 곡우라 하였다. 비를 맞은 보리의 키는 하루에도 반 자는 자란 듯하다. 잦은 비에 부디 적당한 곡우가 내리길 바랄 뿐이다.


▲ 곡우에 보리가 자리는 모습(사진=강순희)

오늘은 대정읍 광정당을 찾아 나섰다. 신화는 광정당 신(神)이 금백조의 둘째 아들이라고 말한다. 여신의 큰아들은 송당 근처 거멀리(덕천리)에 정착하였다. 송당에서 거둔 여문 곡식이 거멀리에서 파종되고 경작되었을 거란 추론은 어렵지 않았다. 그런데 두 번째로 거둔 곡식, 둘째 아들은 어찌 이토록 먼 곳까지 왔을까?


송당에서 제주목관아까지의 거리는 육십 리, 제주목관아에서 대정현성까지의 거리는 팔십 리에 이른다. 순차적인 볍씨의 전파라기엔 거리가 너무 멀다. 그러면 셋째는 어디로 갔지? 3남은 성산읍 신풍리 웃내끼 본향당에 모셔졌다. 4남은 제주시 광양당, 5남은 제주시 내왓당, 6남은 제주시 서낭당 당신이 되었다고 심방은 말한다. 그렇다면 ‘금백조의 아들들은 탐라 지배층의 공식 제장(祭場)에 모셔진 것이구나’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다.

조선의 지방의례는 현(縣)을 기준으로 1묘3단(一廟三壇)을 기본으로 하였다. 1묘는 공자를 모시는 문묘(文廟)로, 현마다 하나의 향교가 세워졌다. 3단은 사직단, 성황단, 여단이다. 사직단은 토지신과 곡식신에게, 성황단은 성과 해자를 담당하는 신에게 제사를 지낸다. 여단은 주인 없는 외로운 혼령들을 위한 제단이다. 이 원칙에 따라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모두 1묘 3단이 설치되었다.


광정당은 3단 중 하나였을 것이다. 사계리 촌로들은 산방산 서북쪽 신맞이동산에 광정당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마을지에 ‘사계리 730번지’라고 기록하고 있다. 2024년 4월 읍사무소에 확인해 보니, 그 지경은 현재 국유지다. 산방산을 우러러보는 그곳에 대정현의 책임자들이 집전하는 당이 있었을 거란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제단이 어디에 있었는지조차 모르는 폐당이지만, 거대한 바위들이 당시의 위세를 말하는 듯하였다.


▲ 폐허된 광정당(사진=강순희)


광정당은 관정당(官廷堂)의 변음일 것이다. 관정은 관가(官家)를 말한다. 시골 사람들은 그 고을 수령을 관정이라 불렀다. 백성들은 관에서 운영하는 당이라 관정당 관정당 불렀고, 어느 시점에 광정당으로 표기되었을 것이다.
이원조의 『탐라지 초본, 권4, 대정현 고적』, (1841년~1843년)에는 광정당에 대한 기록이 있다.

‘광정당은 대정현성 남쪽 5리에 있다. 목사 이형상이 불태워 버렸다. 무오년(1738년) 암행어사가 들어왔을 때 무격의 무리들이 해마다 흉년이 들고 비바람이 고르지 않는 것은 오로지 영험한 신에게 제사 지내는 곳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하며 소(疏)를 올려 다시 설치하였다. 모슬진의 천한 무리가 당을 일시 보수하였으나, 근래에 또 철폐되었다.’

광정당은 이형상 목사의 음사철폐 때 불태워졌다고 한다. 이형상은 왜 관(官)에서 운영하는 당을 음사로 규정하였을까? 우선, 광정당에서는 대정현 수령이 집전하는 공식 의례 이외에 비공식 의례가 다수 행해졌을 것이다. 이는 전승되는 본풀이 내용에서 확인할 수 있다.


기록에서 보듯 1840년 초반, 제주 목사의 눈에 비친 광정당은 천한 무격(巫覡, 남성 무속인)이 운영하는 당이었다. 지역 의례에 그 지역 무격이 동원되는 일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들의 신성 권한은 기존의 탐라 지배층으로부터 왔을 것이다. 그것은 광정당 신이 송당의 둘째 아들이라는 서사에도 반영되었다. 탐라 지배층은 솔당(쌀당)에서 얻은 귀한 쌀을 광정당에 바쳤고, 볍씨 경작이라는 문화 질서를 대정현 중심으로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140년 전 이형상은 광정당에서 이원조가 본 것과 비슷한 모습을 보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광정당은 철폐된다.

그러면 광정당본풀이에는 어떤 비공식 의례가 행해지고 있었을까? 진성기의 <무가본풀이사전>에 나온 광정당 본풀이를 참고하면 ‘기우제’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본풀이는 삼월 열사흗날 입춘춘경제를 지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하늘이 감동하여 비바람이 따라왔다.’ 한다. 이때 앞장선 이가 흙으로 아이 새끼 형체를 만들어 세웠다. 이십 년이 지나도록 서 있던 이 형상은 모가지를 뚝 꺾자 피가 불끈 났다. 후반부에는 앞으로는 원님 사또는 출행하지 않을 것이니, 백성들 제물만 얻어먹으라고 한다.


본풀이대로 이해하면 입춘춘경제가 광정당의 기본 의례였을 것이다. 봄을 맞아 풍농을 기원하는 의례를 올렸지만, 백성들의 원대로 하늘은 비와 햇빛을 내려주지 않았다.

‘석달 여름 동안 가뭄이 지독하여 하루하루가 타들어 가는 듯 녹이는 듯하니 저 논밭을 보아도 피어나다가 오그라들고 있는데, 하물며 가문 밭에 줄기와 잎이 마르고 떨어짐에랴. 우리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장차 구덩이에 넘어지는 것을 구해주소서. 백성들이 재난에 살아남는 사람이 없다면, 신(神)께서는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시렵니까.’

제주에서 선정을 베풀었던 김정의 『노봉문집 3권』, (1736년)에 실린 사직단기우문(社稷壇祈雨文)의 일부다. 수시로 닥치는 한재와 수재에 당신(堂神)들이 응답해 주길 바라는 절절한 마음이 담겨있다. 아마도 대정현에 닥친 석 달 동안의 가뭄이라면 광정당에서 기우제가 벌어졌을 것이다.

본풀이에 나오는 아이 새끼 형상은 무얼 의미할까? 기우제라는 코드에 맞추어 연결추론하면 그것은 석척동자(蜥蜴童子)가 아닐까 생각한다. 석척동자는 푸른 옷을 입고 도마뱀을 잡아넣은 항아리를 버들가지로 두드리며 기우제를 지낸다. 심방이나 기우제 참여자들이 이런 분장을 하고 잠룡을 깨우는 의식을 모의적으로 행할 때 주도적 역할을 한다. 이십 년 후 모가지를 꺾어 피가 났다는 대목은 비를 몰고 올 용신을 깨우는 유감주술의 한 장면으로 해석할 수 있다.

금백조의 아들들, 송당(쌀당)에서 나온 좋은 볍씨들은 탐라 지배층에 의해 제주의 삼현으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하나의 세력이 되고 공적인 의례와 결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 산방산 앞 유채밭에 여행객이 붐빈다.(사진=장태욱)

사계로114번길, 유채꽃밭에 여행객들이 붐빈다. 산방산이 관광지로 개발된 이후에도 홀로 남겨진 사계리 730번지 일대의 광정당. 간단히 참배하고 나오는 길, 기우제도 올리고, 때로는 기청제도 올렸을 그곳의 시끌벅적한 영기(靈氣)가 어떻게든 잊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저작권자 ⓒ 서귀포사람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