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 금백조의 셋째 아들은 왜 하필 신풍리로 갔을까?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⑤] 신풍리 본향당과 성읍리 성황단
5월 5일, 비바람이 불어서 보리가 누워버렸다. 보리 수확이 얼마 남지 않은 걸 생각하면 내 속이 쓰렸다. 하물며 보리밭 주인의 마음은 어떨까. 농민들이 하늘을 섬기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오늘은 성산읍 신풍리를 찾아 나섰다. 송당의 셋째 아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왜 송당의 셋째 아들은 신풍리로 왔을까? 그것은 둘째가 사계리 광정당에 간 이유와 비슷하다. 사계리에는 향교가 있었고, 신풍리에는 향교의 의례를 받드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신풍리는 정의현청에서 근무하던 관리들이 사는 마을이었다. 마을을 끼고 천미천이 흘러 물 걱정이 없었다. 1423년 성읍리에 정의현청이 들어선 이후 내(川) 주변에 생긴 마을이라 하여 ‘내끼’라 불렀다. 이후 반상(班常)의 구별이 심해지던 1722년부터 양호(良戶)는 내의 위쪽에 모여 살아 상천리, 나머지는 내의 아래쪽에 모여 살아 하천리라 불렀다. 훗날 내 끝의 바닷가에 마을이 이루어져 신천리(新川里)가 되었다. 신풍리(新豊里)라는 이름은 1840년경에 ‘새롭고 풍요로운 마을’이란 의미를 담아 지었다. 그러다가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정비로 신풍리는 성산면에 속하고, 하천리는 표선면에 속하게 되었다.
성읍1리 노인회관에서 성읍 동문통으로 방향을 틀었다. 성읍교를 건너니 곧이어 신풍리 마을 표석이 보였다. 요즘 유명한 벚꽃길을 따라 3.4Km 남쪽으로 내려갔다. 우선 천미천 내(川) 터진 것을 보려고 관창대를 찾아갔다. 관창대(觀漲臺)는 물이 불어난 모습을 보는 동산이란 뜻이다. 1960년대 쌓았다는 물맥이(제방) 너머로 천미천 하류가 콸콸 넘치고 있었다.
이 일대 사람들은 천미천 상류 쪽은 진순내, 하류 쪽은 개로내라 부른다. 평소 ‘개로천’이라는 말의 뜻이 궁금했다. 몇 번 신풍리 답사를 다니며 ‘개로천’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개로’의 어원은 ‘ㄱᆞㄹ>가로>가루’라고 본다. ‘가로’를 마을 사람들은 ‘개로’라 불렀다. 이 말이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개로천(介老川)’으로 표기되었고, 『탐라지』에는 ‘개로천(介路川)’으로 표기되었다.
그럼 왜 가루를 풀어놓은 내(川)라고 불렀던 걸까? 그 흔적은 성읍 마을 입구 ‘황통지목’에서 찾을 수 있다. 천미천 상류에서 터진 물이 표층이 얇은 하류 쪽에 이르면 바위틈의 흙까지 쓸어내린다. 큰비가 내린 다음 날 천미천 하류는 ‘가루를 풀어놓은 내(川)’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걸 보고 마을 사람들은 ‘가로내>개로내’ 했을 것이다.
천미천을 현장 답사하는 연구자의 말 속에도 그런 풍경이 묘사되었다.
‘영주산 옆의 좁은 황통지 목을 넘으며 황토를 토해낸 선상지의 충적평야에 성읍 마을이 자리 잡고 있다. 성읍리가 정의현의 읍성이 될 수 있었던 자연지형 조건이다. 이후 하류는 하천리까지 거의 직선으로 흐른다. 매년 호우시마다 홍수가 발생하는 지역이다.’
<출처: 강순석, 천미천 정비사업 무엇이 문제인가, 제주환경일보, 2021.>
신풍리에 좌정한 송당의 셋째 아들은 ‘개로육서또’라 불리었다. ‘개로+육서+또’는 ‘개로내 주변 뭍에 사는 신(神)’이란 의미로 추정한다. 즉, 개로내 주변에 심은 밭벼를 상징한다. 송당의 아들이 좌정했다는 말은 볍씨의 전파 과정이기 때문이다.
신풍리에 살던 지방 향리들은 정의현청의 정기적 의례에 올릴 쌀을 재배해야 했을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체계적이고 안정적인 경작이 필요했다. <신풍본향 본풀이>는 경작의 책임자로 강씨와 오씨 집안이 선택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루 세끼 씩 삼식(三食)을 올리라고 말한다. 그러다가 번거롭고 복잡하니 정해진 날짜에만 정성을 들이라고 한다. 현감의 책임하에 지내는 의례도 실무적 책임을 지고, 마을의 본향당 의례도 진행해야 하는 향리들은 제(祭)에 대한 부담도 컸을 것이다. 이에 일 년 3회로 마을 의례를 간소화하는 질서를 만들어가던 과정이 본풀이 서사에 담긴 것으로 풀이된다.
9대째 신풍리에 살고 계신 오문복 선생님(1938년생)을 5월 12일 만났다.
‘26살 즈음 작은할아버지께서 음력 14일과 30일에 향교에 가서 삭망분향 심부름을 하라고 하셨다. 신풍리에서 남산봉 서쪽 길로 걸어서 50분이면 성읍리 향교에 갈 수 있었다. 제 준비를 마치고 하룻밤을 지내며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신풍리는 퇴직 관리들이 살았던 마을이었다. 지금처럼 교통 통신이 발달하지 못하던 시대에는 퇴직 관리들이 관아 주변에 살아야 했다. 왜냐면 관에서 송사를 해결할 때 그 당시 담당 관리를 불러 물어야 하는 일이 생겼다. 그래서 신풍리도 점점 커지게 되었을 것이다. 동네 지명에 그 흔적이 많이 있다. 예를 들어, 선비장골(玄裨將洞)은 현씨 비장이 살던 곳이다. 비장은 육방에 속한 무관(武官)의 우두머리를 이르는 말이다. 사장터 남쪽 현중례(玄仲禮)의 묘 근처로 669번지 부근이다. 짐비장(金裨將)우연도 있다. 김씨 비장이 살던 집터라는 말로 652번지에 있다.
성읍리 향교에도 사직단 성황단 여단이 있었다. 사직단은 언제나 향교 가까운 곳에 있었다. 향교 북쪽 대숲에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요즘은 제단석 마저 돌담으로 쓰였는지 사라지고 말았다. 대신 포제단을 잘 만들어서 대신하고 있다. 성황단은 마을마다 있었다. 그때는 마을이 크고 넓어 자손 없는 조상들을 위해 마을에서 제를 지내 주었다. 농사는 산듸(밭벼)와 모멀(메밀) 농사를 많이 지었다. 토질이 거칠고 물 빠짐이 안 좋아도 수확량이 그런대로 좋았다. 서속(기장과 조)은 밭에 검질(김) 매는 일이 고달팠는데, 메밀은 밭갈아 심을 땐 힘들지만 검질이 자라지 않아서 할 만했다.’
조선의 지방의례는 현(縣)을 기준으로 1묘3단(一廟三壇)을 기본으로 하였다. 정의향교 북쪽 대숲에 흔적이 남아 있다는 사직단을 찾아보았다. 성읍리 798번지 공터에는 제단석으로 쓰임 직한 바위들만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
다음은 포제단 아래 있는 성황단을 찾아갔다. 성읍리 1534번지, 입구에 섰다. 예전 포제단 왼쪽으로 2019년에 세운 포제청이 위용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주 작은 시멘트 길을 따라 북쪽으로 잠시 가니 포제단이 있었다. 포제단 아래쪽으로 울타리마저 기울어가는 제단이 성황단으로 보였다. 아주 좁아져 예전 모습을 찾기 어려웠다. 그리고 성황단 아래 ‘알단, 낮은단’이라 하여 여단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성읍리 일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포제청 입구에 잠시 섰다. 신풍리에서 수확한 쌀을 정의향교로 운반하느라 땀 흘리는 옛사람들이 보이는 듯하였다. 어디쯤이었을까. 송당의 셋째 아들이 수레에 실려 온 길은……. 매해 풍년을 기원하는 마음을 되새기며 나도 제단을 향하여 인사를 하고 천천히 돌아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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