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당신의 발원지 송당, 거기서 신께 세배를 드렸다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①] 신과세제, 송당본향당

설을 쇠고, 어른들께 세배를 드렸다. 그 후 어른들은 신께 세배를 드리러 간다. 이른바 신과세제다. 어떤 종교든 새로이 시작하는 정초(正初)에는 묵은 것을 버리고 새것을 소망하는 기도를 드린다. 옛것은 무사히 지났으니 감사하고, 새것은 기쁘게 맞이하겠다는 마음이다.


▲ 송당 본향당 가는 길(사진=장태욱)

송당본향당에서 2월 22일 (음력 1월 13일) 신과세제가 열렸다. 비가 내려 천막을 치고, 마당엔 연두색 바닥깔판을 깔았다. 23일에 가보니, 본향당 담벼락에 쌀과 사탕이 놓여있다. 오래된 당골이 금백조할망께 과세를 다녀간 모양이다.

송당신은 제주도 당신의 원조로 널리 알려졌다. 어찌하여 그런 내력이 전해지는가. 송당본풀이에 담긴 역사적, 문화적, 신화적 요소를 찾아보았다. 신화를 읽고, 역사적 요소 먼저 찾아보자.

웃송당의 당신 금백주와 알송당의 당신 소로소천국이 부부가 되어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을 낳고 손자가 삼백일흔여덟으로 벌어졌다. 이 자손들이 제주 각 마을의 당신이 되었다.
소천국은 알손당 고부니모르에서 솟아났다. 아내 금백주는 강남천자국 백모래 밭에서 솟아났다. 백주또가 신랑감을 찾아 천기를 짚어보니, 제주 땅에 배필이 있었다. 백주또는 제주섬으로 내려와 소천국을 만나 부부가 되었다. 자식이 점점 많아져 가자 백주또가 소천국에게 농사를 짓자고 하였다. 남편 소천국은 소에 쟁기를 매우고 피씨 아홉 섬지기의 오봉이굴왓에 가서 밭을 갈았다. 백주또는 밭을 가는 남편을 위해 밥도 아홉 동이, 국도 아홉 동이를 장만하여 오봉이굴왓으로 갔다. 백주또가 나무 아래 점심을 놓고, 길마로 덮은 뒤 돌아갔다. 소천국이 부지런히 밭을 가는데 때마침 지나던 태산절 중이 배고프다며 점심을 달라기에 허락하였다. 그런데, 태산절 중이 소천국의 점심을 모조리 먹고 가버렸다. 배가 고픈 소천국은 할 수 없이 밭 갈던 자기 소를 구워 다 먹고도 모자라 옆 밭에 있는 남의 소를 다 잡아먹어서야 요기가 된 듯하였다. 소가 없어 배때기로 쟁기를 밀며 갈고 있더니, 백주또가 와서 “자기 소 잡아먹은 것은 좋되, 남의 소를 잡아먹었으니 쇠 도둑놈이 아니냐.”며 살림을 가르자 하였다. 집을 나간 소천국은 헤낭곳굴왓에 가서 오막살이를 짓고, 정동갈체 딸을 첩으로 삼아 다시 수렵 생활을 한다.

- 현용준 <제주도 신화의 수수께끼>

▲ 송당 본향당. 쌀은 누군가 과세하고 남기고 간 것이다(좌). 비가 와서 바닥에 천을 깔고 과세했다. (우)

송당신화에는 제주에 우경(牛耕)이 보급되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우경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 지증왕 3년 3월에 처음 나타난다.

<三月, 分命州郡主勸農, 始用牛耕.>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지증마립간 3년(502년) 3월

우경법이 6세기 초 신라에 보급되었다면, 탐라에는 그 이후 전파되었을 것이다. 탐라는 660년 백제 멸망 후에 신라와 조공관계를 맺었고, 678년 이후 활발한 교류를 하였다. 그러나 탐라국은 독립국이었지만, 고대국가로 도약하지 못한 채 938년 고려에 복속된다. 그렇다면 우경법으로 농사를 지었다는 송당신화의 역사적 시간은 어디쯤일까? 거칠게나마 8세기에서 10세기 사이로 상정할 수 있다.


▲ 송당 마을은 세역으로 나뉜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그림 강순희)


송당신화는 송당(松堂)이 세 구역으로 나뉘었다고 말한다. 웃송당, 셋송당, 알송당이라는 명칭이 뚜렷하다. 이는 세력 집단이 매우 컸다는 말이다. 그리고 웃송당의 금백조를 당신의 원조로 모시는 전통에서 가장 큰 권력이 금백조에게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웃송당을 차지한 금백조는 누구일까? 금백조(金白祖)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김씨 성을 가졌다. 김씨 성이 신라에서 유래한 만큼, 금백조의 출신지가 신라 경주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 송당본향의 매인심방 고봉선의 구술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는 금백조가 서울 남산 송악산에서 솟아났다고 구송한다. 이때 서울 남산은 경주 남산으로, 송악산은 신라가 고려에 귀부하여 송악으로 왕가(王家)의 터전을 옮긴 사건으로 읽을 수 있다. 마의태자(麻衣太子)의 일화에도 드러나듯 신라의 국운이 쇠하던 10세기경 왕족들은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금백조 세력도 이즈음 탐라 섬에 입도하게 된 것은 아닐까?


한편, 송당이라는 명칭은 고조기의 <산장야유>라는 시에 나타난다. 고조기는 제주 출신으로 1149년 최고관직 중서시랑평장사에 임명되었고, 고려사에 뚜렷한 이름은 남긴 인물이다. 고려의 실력자가 12세기 어느 시점 탐라를 순력할 때 송당을 특정한 걸 보면, 두 가지 추론을 할 수 있다. 하나는 교통의 중심지 송당, 다른 하나는 정치 문화적 중심지 송당이다. 현재 송당은 제주 당신(堂神)의 발원지이며, 산간 중산간 해안을 잇는 교통 요지이므로 두 가지 모두 가능성이 있다.
두 가지 근거를 엮으면, 송당신화의 역사적 시간은 10세기 전후로 좁혀진다. 금백조는 송당 세력을 이끌며, 제사를 주관했을 것이다. 오봉이굴왓 같은 넓은 경작지와 우경법 같은 농경의 보급으로 생산성이 증대했을 것이다. 주기적인 의례가 안정된 공동체를 만들고, 송당계 집단은 아들 열여덟 딸 스물여덟, 손지방상 삼백일흔여덟으로 벌어질 수 있었다.


▲ 중국 칭다오사람들의 소원지(사진=강순희)


송당신화를 읽으면 누구나 수렵과 농경이 혼재된 문화를 떠올린다. 탐라국은 농경국가가 아니었다. 탐라국의 주생산품은 동물 가죽이나 해산물이었을 것이다. 제주 동북 지역에 농경을 기반으로 하는 송당계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정치 문화적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던 것이다. 200년이 지난 그즈음 고조기가 송당을 다녀갔던 건 아닐까?


신화적 요소는 하나의 문학적 장치다. 신출귀몰(神出鬼沒)처럼 비인간적, 비현실적 서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밥도 아홉 동이, 국도 아홉 동이, 그리고 소천국이 잡아먹은 소 두 마리. 금백조 세력은 소천국처럼 사냥하며 떠도는 무리와 지나치게 많이 징수해 가는 불교 세력을 현실적으로 해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신(神)의 이름을 빌려 말이다.

신과세제를 드리면 신(神)은 우리에게 세뱃돈을 주실까? 설부터 대보름까지 신에게 과세를 드리는 문화를 널리 전파하면 좋겠다. 춘절을 맞아 칭타오 거리에 소원지가 가득 걸렸다. 전통을 이어가는 모습이 보기 좋다. 제주 사람들도 정월만큼은 소원지를 들고, 마을 본향당으로 찾아가면 어떨까. 신(神)이 여전히 우리를 기다릴지 모른다.

저자 강순희
「제주 신화의 숲 - 문화소로 걷다」(2022, 한그루)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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