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라 마지막 성주의 무덤가, 벼는 사통팔달 실핏줄 열었다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⑧] 송당의 8남, 거로에 터를 잡다


1. 부록마을, 벼가 껍질에 싸이어 불룩하게 여물어

‘입추 때는 벼 자라는 소리에 개가 짖는다.’는 말이 있다. 개들도 벼가 쑥쑥 자라는 걸 보며 깜짝깜짝 놀랐나 보다. 요즘처럼 뜨거운 볕이라면 어떤 작물이든 쑥쑥 자랄 거다. 송당의 여덟째 아들, 쌀의 전파 경로를 따라 ‘거로마을’에 이르렀다.


▲ 봉개동에서 거로마을로 향하던 중에 부록마을 표석을 만났다.(사진=강순희)

‘거로마을’로 가기 전 ‘부록마을로 들어섰다. 거로마을은 부록마을에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마을 어귀 조그만 밭에서는 참깨가 잘 여물어 불룩불룩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참깨를 베어 경운기에 싣고 가는 동네 삼춘의 뒷모습에 아버지의 경운기가 소리가 얹힌다.

부록마을은 1100년대, ‘절새미’ 샘터 인근 ‘소림사’ 주변에 마을이 형성되며 설촌 되었다. ‘사찰과 연계된 마을’이라 ‘불우기(佛宇基)> 부루기> 부록’으로 불리었다. (거로·부록 마을지, 2018, 40면)


▲ 밭에서 참깨가 꽃이 피고 씨앗이 영글어 가는 모습(좌)과 농부가 참깨를 수확하고 경운기로 싣고 가는 장면(우)

그런데 백성들이 부르는 마을 이름은 ‘그때-거기-그들’의 입말로 그곳의 정보를 담기 마련이다. 어려운 한자어 ‘불우(佛宇)와 기(基)’를 처음부터 썼을 리 없다. ‘부루기’는 무얼까? 제주어로 ‘부루기는 수수, 벼 따위 식물이 이삭이 채 나오기 전에 껍질에 싸이어 불룩하게 된 것’ (제주어 사전, 1995, 274면)이다. 이 일대에 벼가 재배되었다면 이 주변 백성들은 이곳을 ‘부루기, 부루기’ 불렀던 게 아닐까.

먼저, 화북 ‘ㄷ•ㄹ윗당’ 본풀이를 보자. 김오생 심방(1905년생, 진성기 채록 당시 58세 남무)은 거로에 좌정한 아들이 5남이라고 말한다. 순서가 헷갈린 게다. 이즈음 되면 몇 번째 아들인가는 중요치 않다. 중요한 대목은 여기다.

“공부 삼 년 하여 이 세상에 나오라. 아방국을 찾아가니,
삼문 이서당 들어가서 사당 참반하고,
국당으로 있어라.”
(제주도무가본풀이 사전, 1990, 336면)

조상의 사당에 문안을 드리고 좌정처를 찾으니, ‘국당’의 직능을 맡으라 한다. ‘국당(國堂)’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먼저, 국가 의례를 담당하는 당(堂)이라는 의미, 다음은 쌀 보급에 근간(根幹)이 되는 당(堂)이라는 의미다. 본풀이는 부루기에 자리 잡았던 큰 사찰, 또는 탐라의 권력층이 이 일대에서 벼농사를 관장하였고, 그 쌀을 수확하여 국가 의례를 주도했다고 말한다.


현재 제주대학교 사라캠퍼스 남쪽과 서쪽에서 벼를 재배했었다고 한다. 백성들은 그곳을 ‘웃누러이’라 불렀다. 물이 고이는 땅으로 저수지를 만들고 논농사를 지었었다고 한다. (양영선, <거로·부록 마을지> 집필자, 1950년생) 노인 회관에서 만난 마을 어르신(오영자, 1949년생)도 아라동에서 시집와 보니 ‘웃누러이’에서 부잣집이 ‘나록’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최근 발간된 화북 마을지에 보면 한글학자 이은상이 <조선일보>에 1937년 9월 3일에 연재한 글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화북리(禾北里)라는 명칭에 있어서는 고칭 별도리요, 앞으로 흐르는 하천의 이름도 별도천이라 화북천이라 혼용하고 있거니와, 그러면 별도란 무엇인가. 우리말에는 북(北)을 ‘뒤’라고 하는데 도(刀)의 도와 북(北)의 뒤가 같은 것이요, 별(別)의 음과 화(禾)의 벼가 또한 그렇다는 점에서 별도와 화북은 같은 명칭의 서로 번역한 자임이 분명하다.”
(이야기마을 화북, 2024, 72면)


이은상의 말대로 화북의 옛 이름은 ‘벨뒤, 벨도, 별도’다. 별도봉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이은상은 ‘벨뒤’가 ‘베 뒤’라서 한자어 화북((禾北)으로 기록되었다고 보았다. 벼는 제주어로 ‘나룩’이라 부르지만, ‘베’라 부르는 지역도 있다. 그렇다면 거로·부록마을에서 벼가 재배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졌던 게 아닐까.


▲ 거로마을 안내도를 보면 길이 이곳저곳으로 복잡하게 연결된 것을 알 수 있다.

2. 거로마을, 볏단이 길가에 쌓여서

거로마을로 내려섰다. 마을 이름은 무슨 의미일까? 부록마을이 커지면서 그 주변에도 사람들이 거주하게 된다. 부록마을에서 제주성이나 화북포로 가는 ‘도로 옆에 사람들이 거주하는 곳’이란 뜻으로 ①거로(居路)라 불리었다. 그러다 1500년대 후기부터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큰 길이 있는 마을’ ②거로(巨路)로 1600년대 전기까지 불리었다. 그 후 1800년대 전기까지는 ‘어른들이 장수하는 마을’ ③거로(居老)로 불리었다. 그러다 ‘훌륭한 인물이 많이 배출되고 원로들이 거주하는 마을’ ④거로(巨老)로 1800년대 전기 이후부터 현재까지 불린다.(거로·부록 마을지, 2018, 49~53면)


거로마을의 변천사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거로마을을 직접 걸어보면 얼마나 많은 길과 길이 연결되었는지 알 수 있다. 더불어 제주 동쪽에서 제주목으로 넘어가는 실핏줄이 모두 이곳으로 수렴되는 느낌마저 든다.

그런데 백성들이 부르던 이름은 없었을까? 송당계 아들이 좌정했음을 근거로 나는 엉뚱한 상상을 해 보았다.

부루기 마을에서 불룩불룩 여문 벼를 수확하였다. 볏단은 한꺼번에 처리할 수 없으므로 고적가리를 쌓았다. 이 고적가리를 제주에서는 ‘곤눌’이라 불렀다. 쌀밥을 곤밥이라 하는데 흔적이 남아 있다. 그 후 ‘곤눌’은 ‘곤눌>고누>거누>거루>거로’로 음이 변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제주를 순력 중인 유학자가 거로(居路)로 기록하였다.

3. 제주목 행정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친 마을, 제1거로(第一巨老)


▲ 공사현장 너머로 방묘가 보인다.(사진=강순희)

▲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로 지정된 거로마을 능동산 방묘(사진=강순희)

거로마을 능동산으로 가는 길. 1985년 창건된 한라산 국청사 왼쪽 골목으로 들어섰다. 언덕의 끝에는 무얼 개발하려는 건지 흙먼지 날리는 공사현장이었다. 그 너머 능동산 방묘가 어렴풋이 보였다. 1996년 12월 발굴조사 된 이곳은 탐라의 마지막 성주 고봉례 부부의 묘역으로 추정하고 있다. 고봉례는 1411년 11월, 그의 부인 남평 문씨는 1411년 5월에 별세한 것으로 [고씨세보]에 전한다. (이야기마을 화북, 2024, 236면)

이런 역사 유적 자체가 조선 시대 거로마을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면 지나친 것일까? 마을 어르신(현복선, 1942년생)은 거로는 양반 마을이라 당(堂)이 많지 않다고 하였다. 당(堂)이 일찍 사라진 것은 맞지만, 사실 그 어느 곳보다 당(堂)에 관한 옛 지명이 많은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앞당밧, 섯당밧, 뒷당밭, 큰당밧, 당충개, 사당ㅁ•르, 당칩골목 등등이다.
이 마을은 1700년대부터 많은 유향좌수와 유향별감을 배출하여 제주목 행정에 직간접 영향을 미쳤다. ‘향교에 들어가려면 거로를 거쳐야 한다.’라는 말이 생길 정도였다. 그리고 퇴직한 제주목 관리들이 4㎞ 정도 떨어진 이곳, 거로에 정착하였다. 1800년대에 마을 이름이 거로(巨老)가 된 이유를 알 것 같다.


▲ 공사현장에서 만난 화북 윤동지영감당. 거로마을에 당의 흔적이 거의 남지 않아 윤동지영감당을 유일하게 확인했다.(사진=강순희)

그런데 몇 번을 답사하여도 아쉬운 까닭은 무얼까. 나는 역사· 문화의 중심지 거로마을에서 하나의 당(堂)도 만날 수 없었다. 기록에 남아 있는 가릿당(화북동 1247-6번지)을 확인하기 위해 ‘화북 상업지역 도시 개발 사업 기반 시설 공사’ 현장을 찾았다. 당을 아는 이는 없었고 타워크레인 공사가 진행 중이라 가까이 접근하기도 힘들었다. 다만 <화북 윤동지 영감당>을 만난 것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부디 화북본향당이 공사 내내 잘 버티어 주길 바라며 돌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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