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당의 7남 부부와 몽골의 좌씨 감목관, 이 모래땅에 어떻게 자리잡았을까?

[신화의 숲, 문화소로 걷다 ⑥] 송당의 7남, 한동리 궤본산국

1. 송당계보의 이유를 찾아 한동으로


한동으로 접어들었다. 덕평로에서 한동로로 이어지는 길도 장맛비로 젖었다. 하지 무렵의 비는 농사에 좋다지만 한꺼번에 쏟아지지 말길 바랐다. 구좌읍 한동리 본향당 신의 이름은 ‘궤본산국’. 송당의 일곱째 아들이다. 김오생 심방은 제주시 광양당신, 내왓당신, 서낭당 당신을 4남 5남 6남이라 하였다. 제주목에 송당의 쌀이 널리 쓰였음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탐라 권력층은 송당의 쌀을 토대로 정치적 기반을 다졌다.


그런데 제주목에 좌정한 송당계 아들들에 관한 논의는 다음으로 미룬다. 나의 공부가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한편 마을에서는 한동의 ‘궤본산국’을 송당의 세 번째 아들이라 믿고 있다. 그렇다면 순서보다는 계보에 얽힌 이유를 찾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 한동리 본향당 가는 길(사진=강순희)

2. 중산간과 해안을 연결하는 마을, 한동


한동에 일곱째 아들이 좌정했다는 점이 의아했다. 한동을 작은 마을이라고만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동리는 김녕리와 세화리 사이 중간, 송당과 덕천에 이어 구좌읍에서 세 번째로 면적이 큰 마을이었다. 1112번 지방도를 따라 송당-덕천-한동에 다다르니 예부터 중산간과 해안을 연결하는 마을, 한동의 위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실제로 1908년부터 1935년까지 한동리에 구좌면 사무소가 있었다. 그러다 평대로 옮겨졌고, 제주4·3 이후에는 지금의 세화리에 면사무소가 세워졌다. 지리적으로 한동에 송당의 쌀이 전파될 이유는 충분하였다.

3. 세력가와 문호(門戶)가 사는 마을, 한동


또한, 한동 마을 형성 역사가 의아함을 해결해 주었다. 시간은 원나라가 탐라에 목장을 경영하던 12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동리 마을지에 실린 내용을 살펴보자.

감목관 좌형소(左亨蘇)는 탐라총관부의 주요간부였음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동쪽 목장 수산평과 제주 성내의 중간 지점인 한동에 정착한 좌씨가 이 지역을 관장하였을 것이다. 좌씨는 5대에 걸쳐 감목관 직을 세습하며 한동 마을 해안가에 깊숙이 위치한 ‘고래물’의 좌가장에 정착했다. 좌가장은 아들 좌자이(左自以)가 왕후의 병을 치료한 공으로 하사받았다. 목양하기에 안성맞춤인 땅이었다. 일대 토지는 조선이 건국하면서 향교 땅으로 귀속되고, 후일 지역주민들과 향교 재단간의 분쟁의 씨앗이 되기도 하였다. <둔지오름, 101쪽>

 ▲ 좌가연대 앞에서 농민이 트랙터로 밭을 갈고 있다. 좌가연대라는 이름에 과거 이 일대에 몽골에서 온 좌씨 일족이 살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일대에 사람이 몰리면서 볍씨가 보급됐을 것이다.(사진=장태욱)


원명 교체의 혼란기, 좌씨 일가는 감목관직을 내어놓고 귀화하였다. 곧이어 한동과는 정반대의 한경면 일대와 한림 지역으로 집단 이주하였다. 한편, 좌씨 일가가 남겨 놓은 좌가장과 그 일대 군사시설 <좌가연대>와 <좌가봉수대>는 그들의 세도를 짐작하게 한다.

그 후 1368년 광산 김씨 입도조 김윤조(金胤祖)가 김녕현에 기착하였다. 김윤조는 말년에 이 마을 감낭굴에 터를 잡았다. 그는 이웃에 자리 잡고 있던 선주민 조(趙)씨와 함께 웃굴왓 일대를 개척하고 마을을 형성하였다. 중앙의 문물을 전수하고, 훈학에 힘쓴 결과 마을은 개화되었다.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명도암 선생 김진용은 웃굴왓에서 태어난 그의 8세 손이다. 그리고 1650년 경 고득종의 9세손 고기종이 애월 상가리에서 한동리로 이주하여 방축굴에 터를 잡았다. 방축굴에는 3백여 년에 걸쳐 고씨 집성촌이 이루어졌다.

오늘날 한동리의 호주 또는 세대주별 성씨 분포도를 보면 22개 성씨 3백89세대에 이르고 있다. 그중 김씨가 113세대, 고씨가 96세대로 양대 성씨가 절반 이상 차지하고 있다. <둔지오름, 1997, 104쪽>

이처럼 문호와 세력가들이 사는 마을에 송당의 쌀이 전파될 이유는 충분하였다.

4. 궤 마을에서 볍씨 재배 성공, ‘본산국’이라는 이름으로 ‘송당’과 같은 날 제를 올려


한동리 본향당신, ‘궤본산국’의 의미는 무얼까? 예부터 이 마을은 일주도로 남쪽은 ‘웃궤’, 북쪽은 ‘알궤’라고 했다. ‘궤’는 ‘굴(窟)’이라 생각된다. 해안가 언덕과 일주도로 위 언덕에 자리 잡은 이 마을 전체 지형을 반영한 이름인 것이다. 김씨와 고씨가 처음 터를 잡은 웃굴왓, 방축굴이라는 이름에도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실제로 웃굴왓은 언덕처럼 된 곳의 아래에, 방축굴은 바닷가에서 날아오는 모래를 막기 위해 텟담(방죽담)을 쌓은 아래에 터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 후 1894년 무렵 한동(漢東)으로 마을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른다. 정리하면 ‘궤’는 마을 이름이다.


▲과거 이 일대 사람들은 모래바람 날리는 밭을 일구어 벼를 키워냈을 것이다.(사진=장태욱)

본산국은 처음 시작된 발원지라는 의미이다. 볍씨가 제주에 들어왔고, 재배를 위한 도전이 송당 일대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때 웃굴왓 사람들이 재배에 성공하였던 것이 아닐까? 그래서 신의 이름에 본산국을 붙일 수 있었고, 제사 지내는 날도 송당과 같을 수 있었을 것이다.

5. 군 행렬을 거느린 여신, 둑제를 상징해


본풀이는 궤본산국의 처신(妻神)이 삼천백맷대(三千白馬竿) 일만초깃발(一萬旗幟)을 거느리고 왔다고 말한다. ‘구월 구일 할마니’ 또는 ‘구일 할망’이라 부르는 여신이다. 여신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는 대목으로 분명 중요한 정보를 담고 있음이다.


▲ 둑의 모양. 『세종실록』 오례 중 병기도설(兵器圖說)의 둑

우선 9월 9일에 답이 들어 있다. 조선에서는 9월 9일에 국가의례인 둑제를 지냈다. 군대의 깃발인 둑을 대상으로 한 제로서 읽을 때는 둑제, 표기는 독제(纛祭)라 쓴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도 군대의 출정에 앞서 둑제를 지냈던 기록이 3차례 나온다. 둑기는 곧 국가 공권력을 의미했다. 이에 군사들에게 ‘둑소(纛所)’를 마련하고 철저히 관리하도록 하였다. 제주도에도 둑소가 10곳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 36권』, 세종 9년 6월 10일, 1427년) 그곳은 토호들의 본거지로 백성을 침해하는 폐단이 많았다고 써 놓았다.


이에 한동마을은 ‘궤본산국’을 위한 제와 더불어 둑제를 지낼 의무를 졌음을 추론할 수 있다. 한동리와 둑소의 관계는 더 규명이 필요하지만, 특이한 점은 마을 주민들이 제를 지내러 갈 때 대를 만들어 가지고 가서 꽂았다고 한다. 또한 둑은 독(纛)의 변음으로 도깨비와 관련된 이름이기도 하다. 한동마을에 도깨비 이야기가 유독 많이 전해지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6. 천막 지붕으로 버티는 한동 본향당, 지원이 필요해

한동리 2118번지, 본향당이 있는 위치다. 마을 사람들은 이곳에 큰 바위가 있어 ‘왕둣돌거리’라 불렀다. 마을 길에서 만난 어르신(부연심, 81세)은 지금도 정월, 칠월, 시월 열사흗날 당에 다닌다고 하였다. 당굿이 축소되고 사라지는 게 아쉽지만 시집온 25세 이후 정월 제에는 한 해도 거르지 않았다고 하였다.


▲ 당올레 입구(사진=강순희)

당올레에는 여름 풀이 무성하였다. 한동리종합복지회관의 김현화 사무장은 본향당을 잘 가꾸기 위해 등도 달고, 정비도 열심히 한다고 알려주었다. 다만 아직도 천막 지붕으로 버티고 있는 점이 아쉽다고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천막 지붕을 두른 한동 본향당(사진=강순희)

한동마을 어르신들은 본향당에 대한 강한 자부심이 있는 듯하였다. 대체로 “에에, 이젠 설러부러서.”라는 말을 들었던 터라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본풀이에 담긴 한동마을의 역사가 사라지기 전에 구석구석 밟아보아야겠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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