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없어’가 ‘어서’, ‘각시어멍’이 ‘가시어멍’.. 받침 바람에 날렸나?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⑦]제주어 에피소드 그리고 가장 멋진 제주어 표현

▲ 삼춘과 귤을 따는 날은 키라가 제주어를 배우는 날입니다. 일을 하면서 진짜 제주어의 맛을 알게 됐습니다.(사진=키라)

2017년 겨울, 주인 삼춘을 따라 처음 귤 따러 갔던 첫날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새벽 다섯시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트럭을 타기 위해 위미우체국 앞으로 갔습니다. 처음 보는 삼춘들 틈에 끼어 트럭을 타고 한라산 아래 어느 귤밭에 내렸지요. 고개를 들면 바로 한라산이 눈앞에 있었던 중산간 어디쯤이었던 같습니다. 처음 보는 젊은 여자아이가 귤을 따러 온 게 신기한지 약간의 경계 그리고 어색함과 함께 저를 보던 삼춘들의 눈빛이 기억납니다. "싹 따불라!" 다행히 이 귤밭은 전부 따면 되는 밭이었습니다. (저는 귤을 골라 따는 게 여전히 제일 어렵습니다.)


귤을 따면서 삼춘들이 서로 말을 주고받는데, 도무지 저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어요. 제가 아는 제주어는 ‘소랑햄수다’가 전부인데, 삼촌들이 쓰는 이 제주어는 외계어 같았답니다. ‘아, 이게 외국인 노동자의 마음이구나’하며 알게 되었죠. 특히 귤을 따면서 “동드래로 갑써!” 하면 ‘동드래?’, 당연히 저는 무슨 말인지 모르니 눈치껏 삼춘들을 따라갑니다. 오른쪽으로 가라고 하면 되지, 왜 동드래일까? 북쪽이라고 하면 되지, 한라산 쪽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대체 한라산은 어디 있는 거야? 한라산 찾느라 혼자 바쁩니다. 일이 끝나고 돌아가는 데 귤밭 주인이 삼촌들에게 “속암수다”라고 하는데, 대체 뭘 속았다는 거지? 갸우뚱합니다. 가끔 제가 제주어 못 알아들으면, 주인삼춘은 “나는 서울말 알아먹는데, 왜 너는 내 말 못 알아 듣냐?”라고 해서 웃기도 했습니다.

“기이?”, “게메”, “어게”.
삼촌들과 함께 있으면 이런 제주어를 많이 듣게 되고, 제일 먼저 배웠던 것 같습니다. “정말?”, “그러게”라는 동의하는 추임새 같은 말입니다. 이 단어들이 예뻐서 제가 책방이름을 지을 때 ‘게메책방’으로 이름을 짓고 싶어서 친한 제주 아저씨에게 ‘게메책방’이 어떠냐고 물어본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저는 ‘게메’와 ‘어게’의 뉘앙스 차이를 잘 몰랐었거든요. 그런데 고마운 제주사람이 ‘게메’는 긍정보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그러게’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쉽게도 책방이름이 되지 못했답니다.

어떤 날은 귤을 따면서 삼촌들이 ‘신방’이야기를 합니다. ‘신방’ 혼자 추측해봅니다. 음, 누군가 결혼해서 신혼살림을 차렸나보다. 그런데 주고받는 이야기가 좀 이상합니다. 그래서 물어봅니다. ‘신방이 뭐예요?’ 신방은 무당집입니다.

제주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변 제주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누는데 “둘리가 제주시에 갔는데... 어쩌고, 저쩌고....그래서 둘리가....” 둘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저는 ‘둘리’가 별명인 줄 알았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둘이서’를 ‘둘리’라고 표현한 거였답니다. 그래서 이젠 남원읍 ‘둘리카페’란 이름을 보면 아기공룡 둘리가 아니라는 것쯤은 알게 됐답니다.

주변 제주 사람들과 우스개 소리로 그런 얘길 한 적이 있습니다. 제주에 바람이 하도 많이 불어서 제주어 받침이 바람에 다 날아가 버렸다고. 그래서 ‘없어’가 아닌 ‘어서’이고, ‘각시어멍’이 아닌 ‘가시어멍’이라고요.

처음엔 외계어 같았던 제주어였는데, 이젠 그 뜻을 알게 되면서, 너무 예쁘다며 물개박수를 치며 좋아합니다. 자락자락, 송키, 놈삐, 독새기, 세우리, 시에따이, 촌에따이, 오치비, 용심났어, 소도리쟁이, 족은년...


▲ 삼춘은 풀이 새 모슴 먹기 전에 뽑으라고 했습니다. 풀이 새 마음을 먹는 다는 건 참으로 문학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주어에 들어있는 시적 표현 때문에 그 맛을 더 좋아하게 됐습니다.(사진=키라)

▲ 함께 풀을 뽑고 나서 귤을 나눠먹었습니다. 이런 시간은 제가 제주어의 속살을 제대로 배우는 기회가 됩니다.(사진=키라)

봄이 오던 어느 날, 주인삼춘이 책방 앞 귤밭에 오셨습니다. 책방 앞 잔디밭에 자란 잡초를 보시더니 이렇게 말합니다. “금영아, 이것들 새 모슴 심기 전에 어서 뽑아라” 아니, 세상에 이처럼 멋진 표현이 어딨어요? 새 마음 먹기 전에, 뿌리 내려서 자리를 잡아, 뽑기 힘들어지기 전에 어서 잡초 뽑으래요. 삼춘이랑 둘이 잔디밭에 쪼그려 앉아 잡초를 뽑으면서 아니, 어떻게 그렇게 멋진 표현을 할 수가 있냐고 물으면, 삼촌은 혼자 배시시 웃습니다. 그게 뭐가 멋있냐면서요. 제가 보기엔 이렇게 멋진 시적 표현이 따로 없습니다.

이웃동네 제주삼춘이랑 귤 따고 점심 먹으러 식당에 간 적이 있습니다. 소주를 주문하는데, 노지꺼 달라고 합니다. 노지꺼? 냉장고에 들어가지 않은 실온상태에 있는 소주를 말합니다. “그럼 시원한 냉장고에 있는 거 달라고 할 때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 ‘전기먹은거’.”(이 표현은 제주어 표현이 아니라고 어떤 제주분이 알려주셨어요, 그건 제주에서 공사 현장일 하시던 분들이 쓰신 표현이라고요.) 전기를 먹어서 시원해진 것이랍니다. 어쩜 표현들이 하나같이 직관적이면서도 따뜻할까요?

제주어를 알면 알아갈수록 이들이 어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입니다. 책에서만 봤던 ‘언어는 그들의 문화이자 삶’이라는 것을 제주에 살면서 몸소 배웁니다. 제주를 사랑하는 이들이 제주어도 제주어 표현도 오래오래 기억해줬으면 좋겠습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에 책 「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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