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게칼국수, 쉰다리, 빙떡, 삼춘표 물회.. 인생 최고 호사입니다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③]
귤 따는 날 간식과 점심, 생애 처음 누리는 호사
삼춘들 우영팟은 상추와 쑷갓, 쪽파, 양파 등 연중 채소 공급처
비 오는 날 함께 먹는 빙떡, 여름에 먹는 물회는 자연이 내린 선물
제가 귤 따면서 첫 번째 배운 게 제주 사투리였다면 두 번째 배운 건 리얼 제주 음식이었습니다. 절대 제주 향토음식점에서는 돈 주고도 사먹을 수도 없고, 맛볼 수도 없는 제주 할머니가 손수 만들어주는 진짜 제주 음식 말입니다. 어릴 때부터 제주 삼춘들이 먹고 자란 제주 음식들.
귤을 따면 쉬는 시간이 세 번 있습니다. 오전 9시쯤 오전 간식, 오후 12시 점심시간, 오후 3시쯤 오후 간식 시간입니다. 오전 간식 시간에는 컵라면이나 김밥을 먹기도 하지만, 운이 좋으면 제주 토속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릴 수 있습니다. 요즘 제주 사람들은 먹어본 적 없는 아주 옛날 제주음식 말입니다. 간단하게 소개해 볼까요?
메밀범벅: 메밀가루와 고구마로 만든 담백한 범벅
성게 칼국수 : 해녀 이모가 직접 잡아 온 성게로 즉석에서 만든 칼국수
메밀미역국 : 제주에서는 아이를 낳으면 미역국에 메밀을 수제비처럼 떠서 넣어 끓여먹는다.
고기국수 : 돼지고기를 푹 삶아 중면에 말은 고기국수
잔치국수 : 멸치와 다시마로 육수를 내어 온갖 재료 가득 넣은 진한 국물의 중면 국수
(계절에 따라 호박죽을 먹기도 하고, 팥죽을 먹기도 합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은 12시 점심시간입니다. 직접 싸온 도시락을 다 모여 함께 밥을 먹는데요, 지난밤 제사였던 삼춘은 제사음식을 챙겨 와서 나눠먹기도 합니다. 이때 옥돔구이도 먹고, 소라꼬지도 먹고, 여러 가지 적들도 맛을 봅니다. 제가 특별히 이 식사 시간을 좋아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삼춘들이 도시락 반찬을 짠~하고 펼치면 그 도시락 안에는 제주의 사계절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고사리 철에는 약속이나 한 듯 모두 고사리 반찬을 싸오고, 양애(양하) 철에는 양애무침, 호박잎 철에는 호박잎국을 만들어 오십니다. 어떤 때는 직접 담궈 오신 살얼음 동동 쉰다리를 꺼내시기도 합니다. 쉰밥과 설탕을 이용해 유산균 가득한 달달한 술을 만듭니다. 그 어느 재료 하나 허투루 버리는 법이 없습니다. 또 어떤 날은 직접 만든 오메기떡을 가져오십니다. 시장에서 파는 콩고물 묻은 오메기떡 말고, 제주 할머니가 직접 만든 좁쌀 오메기떡 먹어는 봤나요? 그리고 정말 잊을 수 없는 맛이 하나 있습니다. 아주 더운 여름날, 오후 간식시간에 밭주인 삼촌이 빨간 바구니를 뒤집어 거기에 귤을 손으로 밀어서 귤 주스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정말 옛날 방식 그대로 손맛이 담긴 주스. 제가 어디서 이런 진짜 제주의 맛을 볼 수 있을까요?
▲ 우영팟에서 키운 콩. 우영팟은 삼춘들에게 사계절 반찬을 제공하는 공급처입니다.(사진=키라)
제주 삼춘들이 사는 집에는 우영팟이라는 텃밭이 집집마다 있습니다. 그곳에 자신들의 먹거리를 심고, 그걸로 반찬을 만듭니다. 일 년 내내. 우리 집 텃밭에도 일 년 내내 다양하고 신선한 채소들이 계절별로 자랍니다. 상추, 쑥갓, 쪽파, 양파, 대파, 부추, 방풍나물, 당귀, 토란, 달래… 육지에 살면 어디 상상이나 했을까요, 마트에서 파는 제철 채소가 아닌 내 집 앞 텃밭에서 내가 기른 제철 채소로 내가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 도시생활자에게는 꿈의 음식 아닐까요? 이게 진정한 팜투테이블이 아닐까 합니다. 저 역시 도시에 살 때는 맨날 마트에 가서 매대 위에 모양이 일정한 예쁜 야채를 고르고, 그걸로 음식 비슷한 것을 해먹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11월 중순, 저희 집 텃밭에는 올겨울에 먹을 무, 배추, 쪽파, 쑥갓이 자라고 있습니다. 봄이면 어김없이 집주변에는 항상 달래, 방풍, 당귀, 부추도 제법 올라옵니다. 알고 있으신가요? 초벌 부추가 보약이라는 것을.
봄비 내리던 날, 저는 주인 삼춘과 빙떡을 해먹은 적이 있습니다. 왜 비 오는 날이냐고요? 비 오는 날이 제주 삼춘들 쉬는 날이니까요. 사먹는 빙떡 말고, 제주 할머니가 직접 만드는 빙떡이 몹시도 궁금했었습니다. 우리 집 텃밭에서 기른 무와 쪽파를 뽑아, 제주 메밀가루로 만든 진짜 제주 음식. 빙떡을 만들면서 주인 삼춘은 메밀에 담긴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 몽고족이 제주사람 씨를 말리려고 메밀을 심게 해서 먹게 했는데, 오히려 더 살이 찌고 잘 먹고 잘 살았다고. 제주 사람들이 메밀을 무와 함께 먹으면서 메밀의 독성을 무가 중화시켜줬다고. 이런 이야기부터 메밀떡을 만들 때는 귤 들고 메밀반죽 옆으로 지나가면 안 된다는 깨알 팁도 전해주십니다.
그리고 접시에 참기름을 넣고 무를 톡 잘라 참기름을 묻혀 후라이팬에 무로 기름칠을 합니다. 그리고 나서 메밀떡을 부칩니다. 메밀떡 위에 무를 올려 빙빙 돌려 빙떡을 만들어 먹습니다. 음식점에서 사먹는 빙떡 말고, 제주 할머니가 메밀에 대한 이야기도 해주면서 직접 만들어주는 제주 음식을 어디 가서 먹어보겠어요?
지난여름, 삼춘과 해녀 삼춘이 직접 바다에 나가 잡아온 뿔소라, 미역, 청각으로 제주식 물회를 만들어 주시고, 미역으로 쌈을 싸서 함께 저녁을 먹었던 적도 있습니다. 이처럼 자연이 주는 건강한 밥상을 먹고 사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저에게 제주에 살아서 가장 좋은 게 무엇이냐고 물으면, 저는 제주의 계절을 먹고 사는 것이라고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더불어 제주에 살면 살수록 자연에게 사람에게 감사하는 일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은 책<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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