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집에 젊은 총각 이사 온 후 깨달은 건 ‘진짜 행복’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⑨] 제주에서 깨달은 행복론

나이 서른을 눈앞에 둔 스물아홉은 생뚱맞은 사춘기의 시작이었습니다. 특히 유럽여행을 다니면서 성당을 간다거나 소원을 비는 곳에 가면 항상 똑같은 주문을 외웠습니다. “제발 행복하게 해주세요.”라고. 그리고 여행 갈 때마다 제 여행 가방 속에 들어있는 유일한 책 한 권은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이었습니다. 대체 행복이 무엇이길래 이십 대 후반의 저는 그렇게 행복을 갈망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저는 그리 불행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저는 마음이 참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만 혼자 행복하면 그게 진짜 행복한 건 줄 알았습니다.


▲ 제주에 와서 함께 살았던 강아지(사진=키라)


▲ 고양이와 함께 해서 행복했던 오후(사진=키라)

나이 마흔을 앞두고, 아무 연고도 없는 낯선 제주의 땅을 밟았습니다. 귤밭 안에 덩그러니 놓인 돌집, 이 집에서 무슨 나쁜 일이 일어난대도 옆집에는 들리지도 않을 그런 집. 그런 집에 고양이와 강아지와 살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옆집에 젊은 총각이 이사를 왔습니다.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일단 남자다, 총각이다, 무섭다. 그래서 저는 집에 곧장 CCTV를 달았지요.
열쇠도 없는 시골집에 CCTV 설치하는, 자신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는 육지에서 온 삼십대 여자. CCTV를 켜고 외출을 하면, 집안에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핸드폰은 친절히 알람을 울립니다. 집에서 움직임이 감지되었다고요. 저는 분명 옆집 총각이 무서워서 CCTV를 달았는데, 집밖에 있을 때면 집안에 있는 고양이와 강아지가 잘 있나 하고 자꾸 핸드폰 CCTV를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핸드폰 화면을 보며 말도 합니다.
“미얀아, 뭐해?”
“봉봉아, 여기, 여기 봐봐! 이모 목소리 들려?”


그러던 어느 날, CCTV에 고양이와 강아지가 보이질 않습니다. 잉? “미얀아!”, “봉봉아!” 불러도 대답도 없고, 카메라를 이리저리 돌려봐도 얘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집 문이 열려있네요. 어라! 미친 듯이 집으로 향합니다. ‘얘네들 어디 갔지? 무슨 일 있으면 안 되는데.’ 혼자 별의별 상상을 다 하면서 헐레벌떡 집에 들어서자 아이들이 집안에 떡 하니 앉아있지 뭐예요.


“아이구, 다행이다. 어디 갔다 온 거야? 걱정했잖아. 별일 없어 정말 다행이야.”
그날 저는 알았습니다. 나와 함께 사는 강아지와 고양이가 오늘 하루 별 일없이 다친 곳 없이 아픈 곳 없이 무사하고, 무탈하게 있어 준 것 만으로 감사하다고요. 이게 제가 깨달은 첫 번째 행복의 의미였습니다. 제가 마음 편히 별일 없이 지낸다고, 저만 행복하다고, 행복한 게 아니라는 것을 요. 저와 함께 사는 이들이 오늘 하루도 무사하고, 무탈하고, 평안하고, 평온하면 그것 또한 나의 행복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오랜만에 전화를 건 육지에 있는 친구가 보이스 피싱 사기를 당해서 지금 경찰서 가는 길이라고 했을 때, 그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아플 정도였습니다. 제가 해줄 수 있는 게 들어주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며칠 동안 친구의 사연으로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엄마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차라리 제가 대신 아파서 입원한 게 낫겠다고 생각했습니다.


▲ 이웃가 함께  나눈 점심식사(사진=키라)


행복은 그런 거였습니다. 사랑하는 내 친구가 사는 게 힘든데, 나 혼자 행복하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우리 엄마가 아픈데 어찌 나만 혼자 행복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저 혼자 행복한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요. 제가 사랑하는 당신들이 오늘 하루도 무사하고, 무탈하고, 평안하고, 평온하면 그게 제게도 행복인거라고요.

제주에 살면서 혼자라서 좋다고 행복하다고 했는데, 행복은 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 주변 이들이 행복해야 나도 행복할 수 있고, 내가 행복해야 내 주변 이들도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행복은 그리 대단한 게 아니었습니다. 볕 좋은 날, 집 앞 잔디밭에 앉아 커피 마시며 멍 때리는 것도 행복이었고, 이른 아침 이슬 맺힌 잔디밭 위를 맨발로 밟으며 걷는 것도 행복이었습니다. 동네 이웃들과 함께 맛있는 밥을 나눠먹는 것도 행복이었습니다. 이른 아침 동네 조용한 숲길을 걷는 것도 행복이었고,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우리 엄마 목소리가 밝으면 그것 또한 제겐 행복이었습니다.


▲ 하늘이 마냥 좋았던 제주의 여름(사진=키라)


제주에 살면서 진짜 행복을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저 혼자만 행복 하려 했던 이기적인 모습의 육지 여자는 이미 "굿바이"한 지 오래입니다. 저만 혼자 행복하면 뭐하겠어요? 제 주변 사람들이 아프고, 다치고, 마음에 상처를 입고, 삶이 힘들어 행복하지 않다는데, 제가 어찌 웃을 수 있겠느냐고요. 밥이 넘어 가겠느냐고요.

이제 더 이상 제 여행 가방에 ‘달라이 라마의 행복론’은 없습니다. 오랜만에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습니다. 밝은 친구의 목소리에 저 역시 기분 좋아지는 따뜻한 1월입니다.

<계속>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살아갑니다.
이 글은 책 「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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