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집 새물건만 좋아했는데, 제주도에선 낡은 것에 부들부들

[제주 사는 키라씨 : 제주에서 7년을 살아보니 ⑪] 오래된 물건에 담긴 시간의 흔적과 삶의 이야기

‘키라네 책부엌’은 옛날 제주 돌집을 개조한 책방입니다. 이 건물 나이는 5~60년은 족히 넘었을 것입니다. 이 공간을 채우고 있는 책장, 선반, 테이블은 옛 건물에 맞게 고재 느낌이 나도록 하나하나 직접 만들었습니다.

책방 안 테이블을 보고 간혹 손님들이 묻습니다. 이 문짝은 어디서 떼어서 온 거냐고요. 참 잘 뜯어왔다면서요. 그러면 저는 웃으며 대답합니다. 직접 만든 거라고요. 새 나무를 까맣게 태워서 수세미로 숯을 닦아내고 말리고, 페인트를 칠해서 또 닦아내고 말려서 직접 하나하나 만든 거라고요. 책방 거실의 전등은 옛날 집 창문의 창살을 그대로 살려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창호지를 뜯어낸 방문은 파티션처럼 공간분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본래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용도로 쓰이고 있는 것이죠.


▲ 책방 옆을 지키고 있는 낡은 경운기에 시간의 흔적이 보입니다.(사진=키라 이금영)

어떤 책방 손님은 방문후기에 ‘개취(개인의 취향)가 가득한 곳’이라고 적어놓기도 했는데요. 사람들은 제가 아주 오래된 물건이나 빈티지를 아주 좋아했던 사람인 줄 압니다. 저는 절대 남이 쓰던 물건, 중고를 써본 적이 없었습니다. ‘헌책방’, ‘당근마켓’과 같은 단어는 제 삶에 절대 존재하지 않았죠. 항상 반짝반짝한 새 신발, 새 옷, 새 가방, 새 물건, 새 집만 사용했었습니다.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온 뒤 제 삶에 많은 변화가 생겼답니다. 차 없으면 죽을 줄 알았는데, 걷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해 회사에 다니기 시작했고요, 하이힐 대신 운동화를 사 신고, 명품가방 대신 백팩을 가지고 다녔습니다. 환경이 사람을 바꾸는 걸까요. 제가 살아왔던 물질적 풍요로움과는 전혀 다른 제주에 불시착하게 된 저는 이곳에서 또 다른 시선을 가진 ‘다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남들은 절대 살지 않을 것 같은 초가집에 살게 되면서, 옆집 삼춘이 버린다고 내놓은 촌스러운 옛날 밥그릇과 체에 흥분합니다.


“아니, 이 예쁜 것들을 대체 왜 버려요! 나 줘요, 나!”


▲ 옛날 방문이 책방의 파티션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사진=키라 이금영)

▲ 오래된 저울이 지나온 시간의 무게를 알려줍니다.(사진=키라 이금영)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오래된 물건들에 담긴 이야기가 궁금해졌습니다. 책방 옆에 세워진 빛바랜 경운기조차도 제게는 ‘시간의 흔적’으로 읽히기 시작했거든요. 앞으로 어떻게 늙을 것인가, 어떻게 나이 들고 싶은가… 오래된 집과 물건들을 통해 저의 고민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고, 흐르는 시간에 대한 의미를 발견해 보곤 합니다. 그러다 보니 새로운 것보다는 오래된 것들에 더 눈길이 가게 됐습니다. 삼춘들 눈에는 이미 익숙한 것들이어서 그것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공천포 해녀삼춘네 귤을 따러 갔을 때 삼춘네 거실에 걸려있던 작은 태왁들이 너무 예뻐서 소란을 피우며 감탄하고 있었죠. 해녀삼춘은 뭐가 그리 예쁘냐면서, 너 가져가라! 하셨습니다. 저는 거절 한마디 없이 얼른 가방에 테왁을 담았지요. 태왁 안엔 해녀 삼촌의 그리운 이가 담겨 있었습니다. 삼춘과 함께 물질하던 형님해녀가 이 태왁을 만드셨는데, 후에 바다에서 돌아가셨거든요. 태왁 안에 해녀삼춘의 그리움과 추억도 함께 담겨 있었던 거였습니다.

아침에 책방에 출근하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일력 한 장을 톡 뜯는 일입니다. 일력 옆에는 작은 요리용 저울이 있어요. 무심코 뜯은 일력 한 장을 그 저울 위에 올려놓았지요. 그다음부터 자연스레 저울 위에 일력이 한 장씩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책방 손님이 그걸 보고는 “이건 ‘시간의 무게’네요” 하고 말했습니다. 1년 치 시간의 무게는 250g.
저울의 시간의 무게는 가벼운 듯 보이지만, 우리의 삶은 절대 그렇지 않지요.


▲ 삼춘들이 일을 하다가 책방을 구경하는 장면(사진=키라 이금영)

제주에 살면서 주변 어르신들의 주름에서 그들의 시간의 흔적과 무게를 읽고, 오래된 물건들을 들여다보며 그 물건에 담긴 이야기를 보게 되었습니다. 발전과 개발이라는 이유로 자꾸만 제주의 소중한 많은 것들이 사라져가는 요즘, 또 어떤 이들은 무한히 반복되는 지루하고도 평범한 일상과 함께 꾸준히 시간의 흔적을 지켜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살면서 느끼는 요즘입니다.


글쓴이 키라
2017년 봄부터 2023년 11월 현재 제주 서귀포 남원읍에서
제주 관광객과 현지인 사이, 그 경계에 이주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음식이야기 책방 <키라네 책부엌> 책방 사장으로,
문화도시 서귀포 책방데이 프로젝트 매니저로,
귤 따는 계절에는 동네 삼촌들과 귤 따는 이웃으로 갑니다.
이 글은 책<키라네 책부엌>에서 발췌한 내용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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