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포리 참사’ 함경환, 한-일 청구권 협상 대상이었다

[아카이브 군대환 ②] 승객 물에 빠져도 그냥 떠난 함경환, 해방 이후 미군에 대여


일제강점기 제주도민을 오사카로 실어날았던 군대환(君代丸)이 취항한 지 100년을 맞았다. 제주자치도는 7일부터 오는 11월 3일까지 제주대학교 박물관 3층 전시실에서 군대환 취항 100주년 기념하는 특별전시를 하고 있다. 군대환과 함경환, 교룡환, 목목환 등 제주도민을 일본으로 싣고 나르던 여객선과 관련한 사진과 신문기사 등이 전시됐다.

이번 전시가 가진 의미가 큰 반면, 아쉬움도 적지 않다. 전시가 군대환에 집중됐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료가 부족했기 때문인지, 군대환을 제외한 나머지 연락선에 대한 조명이 너무 약하다. 필자는 함경환(咸鏡丸)의 역사적 가치가 군대환 못지않다고 판단해, 함경환에 대한 자료를 찾아 기사로 보충했다. 이후에도 함경환에 대한 전문가의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기자 주

▲ 이번 전시에 걸린 함경환 관련 내용은 이것이 전부다.(사진=jpnship에서 발췌)


당시 언론보도에 따르면, 1928년 1월 27일에 제주와 함경환이 대포리에 기항하던 중 종선에 탄 승객 48명이 물에 빠지는 사고가 발생해 그중 25명이 사망했다. 일제 해운업자들이 조선인을 하찮게 여겼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함경환은 일제가 조선해운을 장악할 목적으로 설립한 회사가 운영하던 연락선이었다.

1910년 일본이 조선을 병합한 후, 조선총독부는 조선 내 해운사업을 통일할 목적으로 해운회사를 설립하도록 했는데, 그렇게 탄생한 게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 이하 조선우선)다.

조선우선은 창업 당시 총 19척의 선박을 확보했는데, 90%가 목조선이었다. 강철 선박은 두 척에 불과했는데, 그 가운데 한 척이 함경환(1908년 건조)이었다. 조선우선은 1920년대에 총 14개의 항로를 운항했는데 그중 하나가 제주-오사카 노선이고, 1924년 함경환을 처음으로 이 노선에 투입했다.

함경환도 군대환처럼 제주도를 일주하면서 승객을 실었다. 당시는 부두 시설이 열악했기 때문에 작은 종선으로 승객을 운반해 본선에 태워야 했다. 사고가 발생한 날도 대포마을 자장코지 앞에 정박한 상황에서 종선으로 승객을 옮겼는데, 종선이 함경환에 도착한 순간 파도가 높게 일어 종선이 침몰하고 말았다. 종선에 타고 있던 48명 가운데 23명만 구조되고 25명이 익사했다.


매일신보는 1928년 1월 29일자 기사로 함경환의 참사 소식을 전했다. 기사는 ‘27일 오후 4시, 전남 제주도 대포에서 조선우선기선 함경환에 승선하려는 40명의 승객이 부선에 올라 함경환으로 향하던 도중 푹풍이 불어 부선은 전복되어 그중 22명이 행위불명되었다’고  첫 보도를 전했다.


그리고 31일자 후속 보도에서는 ‘참사의 원인은 당일 대포항에 북풍이 정면으로 받아 원천(遠淺 : 앝은 물가에서 멀리 떨어진다는 뜻으로 보인다.)으로 됐기에 함경환을 포구 가까이 의선(艤船 : 포구에 배를 의지한다는 의미로 보인다)하지 못하고 멀리 포구 외에 정박하게 되어 48명이 조그만 종선으로 해상을 건너가다가 풍랑과 또는 승객이 너무 많았던 탓에 그와 같은 참극을 연출한 듯 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행방불명된 사람들의 정확한 수는 25명 전부 익사한 것으로 판명되었다’며 ‘조난자의 주소와 성명 등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남자 11명과 여자 10명, 아동 4명으로 모두 제주도에서 내지(일본)로 도선하려는 사람들’이라고 덧붙였다. 


처음 보도와 후속 보도에 승객의 숫자에서 차이가 있는데, 후속보도의 수가 더 정확할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매일신보가 전한 대포리 참사 기사로 왼쪽은 2018년 1월 29일자, 오른쪽은 1월 31일자 기사다.


그런데 함경환은 사고가 발생했는데 위험을 알리는 경적을 울리지도 않았다. 게다가 구명보트를 내려 물에 빠진 승객을 구조해야 하는데, 그런 조취도 취하지 않고 떠나버렸다. 유족들이 대표단을 구성해 선사에 강력하게 항의한 결과 회사는 선장을 파직하고 대포항 취급소장 강성익을 경질했다. 그리고 익사자 1인당 30원씩 위자료를 지급했다. 새로운 곳에 삶을 개척하겠다는 꿈과 함께 함경환에 몸을 실으려 했던 당시 중문면 일대 사람들은 허무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고가 발생한 후에도 조선운선은 1935까지 제주-오사카 항로를 운항했고, 이후 경영 수지상의 이유로 항로를 폐했다. 이후, 함경환이 해방시기까지 어느 노선에 투입됐는지 좀체 확인돼지 않는다.


▲ 우리 정부가 한일 배상금 협상을 준비하면서 작성한 문서인데, 일본이 전 조선우선이 보유했던 5척 선박의 소재를 확인해달라고 요청했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함경환도 그 5척에 포함됐다.(사진=동북아역사넷, 한일회담외교문서)

제2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일본은 많은 선박을 잃었다. 조선우선도 선박 26척을 전쟁 가운데 잃었고, 해난으로 3척을 잃었다. 그런데 일본이 패망해 조선을 떠날 때, 주한미군에 대여했던 선박이 여러 채 있던 것으로 확인됐다. 1960년대 정부가 작성한 문서에 함경환의 이름이 등장한다.

정부가 한일 간 재산 청구권 협상을 준비하던 도중, 교통부가 1965년 8월 23일 작성한 문서 ‘일본측 요청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다.

‘45.11.27.부터 1947.6.14.까지의 사이에 일본으로부터 재한 미군당국에 파견되어 그후 한국에 대여된 5척의 전(前) 조선우선주식회사(朝鮮郵船株式會社) 소속의 선박들인 김천환(金泉丸), 안성환(安城丸), 천광환(天光丸), 함경환(咸鏡丸), 앵도환(櫻島丸)에 관한 사항’으로 ‘ 상기 5척 중 몇 척이 한국 내에 있는지’ 일본이 문서로 확인을 요청했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1965년 8월 31일 작성한 ‘한일 간 재산 및 청구권 문제 해결에 따른 자료정비’에는 일본측 질의에 답신할 내용으로 선박의 소재에 대해 정리한 내용이 있다.

안성환 인천 1951,12,23 석탄 수송 중 포항 앞바다에서 침몰(인양치 못함)
함경환 인천 1951,5, 부산 앞바다에서 침몰된 채로 대한물산주식회사에 137,000원에 매각그후 해철
앵도환 인천 1948년도 남북무역차 북한 흥남"에 입항 후 북괴에 불법 억류됨
천광환 천안호 인천 화물선 대한해운공사 부산항
금천환 반도호 부산 실습선 해양대학 국내 1959,12, 해운공사에서 해양대학에 6,500,000원에 매각


▲ 일본의 요청에 대해 우리 정부가 5척 선박의 소재를 확인하는 내용이 있는 문서(사진=동북아역사넷)

여기에 나오는 반도호는 필자가 졸업한 한국해양대학이 운영하던 실습선 이름인데, 선배들은 낡은 실습선 반도호를 타고 세계 일주를 했다는 얘기를 전설처럼 되뇌곤 했다. 정부 발표는 대체로 사실로 보인다.

함경환은 운명을 개척하러 떠나는 수많은 제주사람을 오사카로 실어 날랐고, 해방 정국에는 미군정 치하에서 혼란스러운 조선의 상황을 지켜봤다. 그리고 한국전쟁으로 혼란하던 어느 봄날, 임시수도 부산 앞바다에 빠져 배로서의 수명을 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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