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학과 감귤산업의 초석, 타케 신부를 기억하라

[타케 신부 아카이브 ①] 타케 신부 탄생 150주년 기념 전시 ‘타케의 정원’


에밀 타케 신부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서홍동 소재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면형의집에서 열린다. 주제가 ‘타케의 정원’인데, 제주도에 자생하는 다양한 식물을 채집해 전 세계에 알린 타케 신부의 업적과 생애를 보여주는 자료가 전시됐다. (사)서귀포문화사업회·(사)에밀 타케 식물연구소·국립수목원이 행사를 주최했다.


▲ 타케 신부 탄생 15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회가 면형의집 3층에서 열린다.(사진=장태욱 기자)

에밀 타케 신부(한국인 이름 민덕효, 1854~1933)는 제주도에 가장 먼저 미장온주를 도입해 제주도 감귤산업의 초석을 다진 인물로 잘 알려졌다. 그런데 미장온주 도입은 타케 신부가 제주 재임기간에 남긴 수많은 업적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타케 신부는 제주민란의 결과로 거의 몰락해가는 천주교의 교세를 회복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고, 식물학계에는 제주에 자생하는 수많은 식물들을 채집해 세계 학계에 기록으로 남겼다.

에밀 타케 신부는 1873년 10월 3일, 벨기에 국경에 가까운 프랑스 노드 주에서 출생했다. 1892년 9월, 파리 외방전교회 신학교에 입학해 1897년 9월 사제서품을 받았다. 1898년 1월 선교사로 조선에 입국해, 그해 4월 부산본당 3대 주임신부로 부임했다.

타케 신부는 1902년 4월 20일 마산포를 떠나 서귀포 하논성당에 도착해 3대 주임신부에 부임했다. 당시 제주도 천주교는 1898년 방성칠의 난과 1901년에 신축교난(이재수의 난) 등을 겪고 쇠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 타케 신부의 생애를 설명하는 내용이 전시됐다.

타케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그가 부임할 당시 하논마을에는 11가구 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당은 논에서 10미터 거리에 불과해 습기가 많아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1902년 6월 27일에는 폐쇄적인 하논성당을 버리고 홍로본당으로 이전했다. 이재수의 난의 영향으로 천주교가 위기를 처한 상황에서, 타케 신부는 제주 천주교 부흥에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대학살의 트라우마 속에서도 혈맥이 꽉 막힌 고정관념과 편견을 걷어내 제주민의 마음을 열었다.

1900년대에 이르자 제주도 식물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다. 1905년 일본인 학자들이 연구를 시작했고, 1906년 포우리 신부에 가세했다. 타케 신부는 포우리 신부의 지도를 받아 1906년에 연구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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