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창리 진씨 1800년대에 상문리 윤못화전으로 이주, 목축으로 가업 일궈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68) 중문동 상문리화전

조선시대 중문리 북쪽에 상문리라는 화전마을이 있었다. 1914년 상문리 화전 지역에는 47호가 살았고 이들은 밭 149필지, 임(林) 여섯 필지를 소유했다. 그 중 여덟 가구가 윤못화전에 살았다. 윤못화전은 거린사슴오름 기슭에 있었던 연못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 윤못화전

윤못화전의 위치는 거린사슴오름 북쪽, 중문동 18 ∼ 32번지에 해당한다. 제2횡단도로(1100도로)에서 거린사슴오름 뒤 한라산둘레길로 70m를 들어서면 묘 맞은편 거린사슴오름 기슭 아래 ‘윤못’이 있다. 이 연못은 우마들이 마시던 못이기도 했다. 이 못(池) 일대에 화전이 현성되어서 화전지명이 윤못화전이다.


▲ 윤못화전지 옛터(사진=한상봉)

중문동 19번지 오씨(吳氏) 비문에는 윤못을 뜻하는 한자 ‘윤지(潤池)’로, 그 동쪽 65m 거리에 있는 고공(高公)의 비문에는 한글로 ‘윤못’이라 쓴 지명이 보인다.

과거 중문동 19번지에는 양남천(梁南千)이 살며 중문동 18, 20번지 밭을 소유하고 있다. 중문동 22번지에는 김백이, 24번지에는 고재운이, 26번지에는 양재○이, 27번지에는 ○○○이, 30번지에는 김천석이, 32번지에는 진재평이, 33번지 진명평이란 사람이 거주했다. 이들은 거주지 주변 밭을 소유해 경작하고 살았다.

하원동 진동환의 가계도를 보면 고조부 진한득(秦漢得) → 증조부 진달훈(秦達訓 , 1851생) → 조부와 조부의 형제들 진재평(秦才平, 1878 생), 진인평(秦仁平, 1890 생), 진명평(秦明平, 1896 생), 진기평(秦基平, 1902생)이 보인다. 진재평의 후손이 진동환으로 중문동 26, 31, 32번지 땅을 소유하고 있다.


▲ 윤못화전 지적원도(한상봉)

2016년 개별 고시 기준으로 중문동 26번지는 3320원, 32번지 4320원, 31번지 3940원의 세금을 내고 있다. 둘째 진인평은 1914년 지적원도에 이름이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 다른 마을로 이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지적원도에는 진명평이 중문동 33번지에 거주하며 중문동 23, 25번지 땅을 소유하고 있었고, 막내아들인 진기평은 1904년생이라 나이가 어려 등기 사항이 없었다.

진○○의 구술에 의하면, 이 집안은 진달훈 시절에 한경면 신창리 ‘두미나물’에서 윤못으로 이주를 했다고 한다.  이로 보면 진 씨 집안은 1800년대 후반에 윤못으로 이주했음을 알게 한다. 이들은 윤못에서 메밀, 팥 등을 재배했으며, 쉐 50마리 정도를 키웠다고 한다. 이로 인해 삶이 좋아져 부친 때 해방 이전 하원동 법화사 인근 물이 나는 곳으로 이주해 살게 됐다. 법화사엔 장안택이란 대처승이 법화사경 내 자신의 밭을 빌어 작은 절을 지어살기도 했다고 한다.

회수동 양○호(1937생)은 자신의 조상이 애월읍 상귀리에서 윤못으로 이주 했다한다. 윤못 화전지 중 중문동 35번지에 양만○(梁萬○)으로 보이는 자가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 땅의 주인 일족이 양○호의 조상으로 추정된다. 1914년 토지조사사업 이전에 윤못 화전지를 떠난 것이다.

윤못에는 지적원도엔 안 보이지마, 고 씨 집안이 살았다고 한다. 고 씨 집안 후손들이 현재 월평동에 살고 있다고 한다. 중문동 19번지 동쪽에 있는 고공의 묘와 관련 있어 보인다.


▲ 법화사 연못. 윤못화전 진 씨 집안 사람들은 목축으로 부를 일군 후 법화사 주변으로 이주해 살았다.(사진=장태욱)

녹하지화전에는 열 가구가 살고 있었다.

■ 녹하지 화전

녹화지화전은 녹하지오름 북쪽 12시에서 3시 방향 사이에 위치한다. 중문동 산 2번지에서 빠진 공간에 살았던 화전민들을 이른다. 화전지 중 일부는 멀리 녹하지오름 1시 방향으로 2.55km 지점에 있는 표고장 인근까지 화전이 형성돼 있었다.

산 2번지는 일제강점기에 ‘백만원케’라 불리며 중문동 마을목장으로 이용됐는데, 암쉐장이었다. 해방 후 국가소유로 변경되자 1970년대 중문리 이장을 지냈던 김유부 이장이 지역민들과 반환소송을 내 서울을 오가며 15년간의 법정싸움을 통해 마을 재산으로 귀속시켰다.

소송 시 법정싸움에 증거를 제시하기 위해 김유부 이장은 녹화지 화전민 출신이나 그 후손을 찾아다니며 연대 성명을 받고 증거를 수집했다. 화전민과 그 후손들이 마을 공동목장을 찾을 수 있도록 도움을 준 것이다.

녹화지 화전엔 ‘대선머들’, ‘오영감집터’, ‘아라리 집터’, ‘서궤밧화전’, ‘원석이집터’, ‘진사만·진기만 형제 집터’로 불리던 곳이 있다. 그곳엔 집터와 대나무, 돌방아, 화장실, 깨진 그릇, 산전 등이 남아있다.

이중 원석이집터와 진사만집터의 사람들은 1914년 지적원도에 보이는 중문동 3번지와 16번지에 살다 녹하지오름 뒤로 이주해온 사람들 또는, 그 후손들이다.

상문리 마을 중 녹하지화전에 누가 살았는지는 토지조사사업 시 토지, 대지 등기자료와 원석이 터에 살았던 김○현의 구술로 확인된다. 이들은 담배잎, 감자, 메밀, 팥을 재배하며 해안마을과 물물교환 했고 숯을 굽고 쉐를 키웠다고 한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 「남원읍 화전민 이야기」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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