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인생 건져 올린 건 운명의 오징어와 고향 서귀포
[브라보 마이 라이프] 오두성 D수산 대표
조실부모하고 서귀포에서 불우하게 시절을 보낸 소년이 사업에까지 실패하면서 한때 빈털터리가 됐다. 도시 공사장을 전전하기도 했는데, 먹고 살기 위해 울를도에 들어가 오징어를 만났는데, 그 이후 운명이 달라졌다. 드라마와 같은 반전 인생을 살아온 주인공을 만나 인생 이야기를 들었다. 지금은 영덕에서 D수산을 운영하는 오두성 씨가 그 주인공이다.
오두성 씨는 1960년, 서귀포시 남원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일찍 부모님을 여의고 누나 밑에서 자랐다. 시골에서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소년기의 일은 배고팠던 기억밖에 남지 않았다. 서귀포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공부에는 의욕을 갖지 못했다. 예비고사를 볼 생각도 없었고, 대학에 진학할 마음도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해서는 방위병으로 병역을 마치고 가정을 꾸몄다.

가정을 일군 후에는 서귀포시내에서 식당을 개업했다. 가장이었지만, 나이가 어려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부모님께 물려받은 집과 밭이 있었는데, 그걸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받고 일식 식당을 크게 열었다. 1988년의 일이다.
준비도 안 된 상태에서 일식 식당을 크게 열었는데, 비브리오 폐혈증이 불러온 소위 ‘괴저병 파동’이 전국을 휩쓸었다.
비브리오균에 의해 오염된 어패류를 먹으면 비브리오균이 장관을 뚫고 핏속으로 들어가 증식해서 패혈증 증세를 야기한다. 패혈증이 발생하면 환자는 쇼크 상태에 빠지고, 피부가 썩어들어 사망에 이르게 된다. 브비리오 패혈증으로 전 국민이 공포에 빠졌고, 횟집들이 하나 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개업 2년 만에 손님은 뚝 끊겼고, 오두성 씨도 폐업을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가게 문을 임시로 닫아놓고 부인과 함께 바람을 쐬러 서울로 갔는데, 그 사이 가게에 ‘난리’가 났다. 빚을 받으려는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결국 있던 집과 땅은 모두 경매에 붙여졌다. 오두성 씨 부부는 자녀 네 명과 함께 모두 거리에 내않게 생겼다.
자녀들은 처가에 맡겨두고 부부는 돈을 벌려고 도시로 나갔다. 분당 신도시 건설이 추진되던 시절이어서, 분당에서 공사현장을 전전하며 날일을 했다. 벽돌도 져서 나르고, 신축 아파트 도배도 했다. 부부가 받는 일당은 각각 2만 원이었다.
그렇게 일을 하던 중에 벼룩시장 광고에 눈에 띄는 문구가 있었다. 울릉도에서 어선을 타면 월급 150만 원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부부는 바로 울릉도로 갔다. 한 달 5만원 내고 여인숙에서 생활했다. 오두성 씨는 뱃일을 시작했고, 부인은 오징어 배를 가르는 할복 일을 했다.

“나는 뱃일을 처음이라 고기를 잘 잡지 못했다. 고기를 못 잡는 날은 내가 기름 값과 식비를 뱉어내야 할 처지였다. 기대와 달리 돈이 벌리지 않았다. 아내는 매일 일당 3만 원을 버는데 나는 마이너스였다.”
그리고 한 달 쯤 지나니 고기를 잡는 요령이 조금 생겨 하루 1~2만 원 벌이는 됐다. 몸에도 맞지 않고, 돈도 벌리지 않아 뱃일을 그만뒀다. 다음에 오징어 덕장에서 일을 시작했다. 당시에는 동해안에 어촌마다 덕장이 있었다. 구룡포(경북 포항시), 양포(경북 포항시), 명지(부산시 강서구), 삼천포(경남 사천시), 고성(강원도 고성군)까지 동해안 여러 덕장을 누볐다.
오징어 할복작업은 철저하게 성과제다. 손이 빠르고 부지런한 사람은 돈을 많이 벌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수입이 적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새벽부터 일을 하는데, 그 풍경은 전쟁터를 연상케 했다.
부부는 돈을 벌기 위해 악착같이 일을 했다. 한 달 내내 오징어 배를 가르는 일을 하면, 부부가 한 달에 500만 원은 손에 쥘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 시절이던 1997년 무렵인 점을 감안하면, 500만 원은 상당한 돈이었다.
우리 부부가 가장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장이 인정을 해줬다. 당시 범죄자들이 몸을 숨기기 위해 덕장에 찾아오기도 했는데, 이들도 덕장에 적응하기 위해 오두성 씨 말을 잘 따랐다고 한다.

“1년에 쉬는 날이 명절을 포함해 3일 밖에 되지 않았다. 부모님 제삿날에도 일을 했다. 제사를 그냥 넘길 수는 없어서 물만 올려놓게 지내기도 했다.”
그렇게 덕장 일을 몇 년 했더니 2003년에 부산시 해운대구에 아파트 한 채와 조그만 식당 하나 마련할 수 있었다. 식당에서 돈까스 요리도 했고, 조기 매운탕도 팔았다.
그런데 식당 일이 성에 차지 않았다. 식당으로 밥은 먹고 살겠지만, 고향에 있던 재산을 탕진한 걸 되찾을 수는 없었다. 덕장 일을 할 때 사장이 많은 수익을 올리던 걸 봤기 때문에 그 사업에 도전하고 싶었다. 아내는 남편의 계획에 반대했다. 그 일이 너무 고돼서 진절머리가 난다고 했다. 아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아파트를 팔고 사업에 도전하기로 했다.
2015년 경국 영덕군 축산면에 있는 덕장을 임대해 사업들 시작했다. 오징어 배를 따고 말리는 일에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2년 동안 오징어 가공해서 말리는 일을 열심히 했는데, 오징어 제품이 팔리지 않았다. 사업에 생산 못지않게 판로가 중요하다는 걸 그때서야 깨우쳤다. 회사는 수입이 없어 자금난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30년 전 일식집 문을 닫던 시절의 악몽이 떠올랐다.
“정말 절망적이었다. 살고 싶지 않았고, 스스로 나쁜 마음을 먹기도 했다. 아들이 회사 걱정을 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마지막이 될 지로 모르니 산소에서 부모님을 뵙기로 하고 고향을 찾았다.”
그리고 부모님 산에 벌초를 마치고 영덕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2017년 9월의 일이다.
어느 날 집에 손님이 찾아와서 자신을 가락동 농수산물 도매시장에서 일하는 경매사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D수산의 오징어 품질이 좋다며, 가락동 도매시장으로 보내면 좋은 가격으로 꾸준히 팔아보겠다고 했다.
오두성 씨는 그 사람의 말을 믿고 실행에 옮겼다. 실제로 가락동 수산시장에 반건조 오징어를 올렸는데, 계속 좋은 가격에 낙찰됐다. 재고가 많았기 때문에 오징어는 계속 올라갔고, 회사 통장으로 하루에 1억 원이 입금되는 날도 있었다.
사업이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자금 문제도 해결됐고, 그 사이 새로운 거래처도 생겼다. 흔들리던 회사는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회사 직원이 10명 쯤 된다. 작년에 매출액 약 80억 원을 기록했다. 사업이 잘 되니까 우리 아이들도 모두 이 사업을 한다.”
자녀 4명 가운데 세 명이 건어물 사업을 한다. 이들은 D수산 오징어뿐만 아니라 다른 회사의 제품들도 판다. 젊은이들이어서 온라인 시장을 집중 공략한다. 각기 연 매출 30억 씩 기록한다니, 가족은 해산물로 기업을 이루고 있다.

오두성 씨는 삶이 어려워서 고향을 떠났지만, 한시도 고향을 잊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고향에 있는 부모님 산소를 찾은 뒤에 사업이 활로를 찾은 것도 운명이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어려운 삶을 살았지만, 고향에서 자신처럼 어려움을 겪는 이들을 돕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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