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하는 숲, 상수리나무 낙엽은 겨울딸기의 보금자리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17) 월랑지

 걸출한 주변 오름들 못지않게 찾아가야 하는 이유

월랑지는 가까이에 있는 동거문이오름, 백약이오름, 좌보미오름 같은 걸출한 오름들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게 보여 눈길을 주는 이가 많지 않다. 오름 마니아들에게는 이 오름 주변에 있는 초원 습지 ‘진남못’이 알려져 있다. 오히려 오름 탐방보다는 이곳 습지만을 선택지로 하고 걸음을 한다.


▲ 동쪽에서 바라본 월랑지(사진=김미경)


동거문오름이 만들어 낸 수산곶자왈이 그 일대에 있다. 곶자왈과는 어울리지 않을 만큼 오름 산체 대부분이 삼나무로 조림되어 있다. 겉에서 본 오름 자락은 그 형체를 구분할 수 없을 만큼 수목이 꽉 채워져 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아도 들여다보기 전엔 장담하기 이르다. 나름대로 그 특징을 가져 이곳을 찾게 되는 이유가 된다.

 비목나무가 무슨 뜻? 제주어에 그 뜻이....

비 소식이 있는 날, 어두운 하늘에 숲은 더욱 캄캄하다. 숲 안은 겨울 자락에 접어든 활엽수와 덤불들이 시들어 사이사이 빛을 내어준다. 삼나무가 너무 빽빽하여 날씬하고 키만 크다. 하지만 빛을 받지 못하는 아래쪽은 스스로 가지를 떨어뜨린 덕분에 다른 식물들이 들어앉는다. 상록활엽수인 어린 참식나무가 밑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경사면에서 불어온 바람에 초록의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움직이는 모습이 귀엽기까지 하다. 저절로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숲 안은 빛과 물이 모자라 대부분 식물이 살아남기는 힘든 환경이지만 그곳에 맞는 비목나무는 그 속을 비집고 들어와 벌써 왕성하게 자랐다. 잎과 꽃을 품을 겨울눈은 위쪽에서 겨울을 잘 견디고 있으니 봄이 오는 소식을 아마 빨리 전해주지 않을까.


▲ 월랑지 오르는 길에 많은 식물을 만났다. 왼쪽 : 껍질을 벗는 비목나무/ 오른쪽 위 : 삼나무 숲 아래 자라는 어린 참식나무들/ 오른쪽 아래 : 겨울딸기 군락(사진=김미경)

비목나무는 오래된 나무일수록 나무껍질이 불규칙하게 벗겨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고대인들은 이런 현상을 보고 뱀을 연상한 것 같다. 비목나무는 제주어로 ‘베염푸기’ 또는 ‘베염페기’라고 한다. ‘베염’은 뱀을 말한다. ‘페기’ 혹은 ‘푸기’는 알타이어권 여러 언어 ‘푸유’에서 온 말이란다. 작은키나무나 덤불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말은 제주어에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 전승된다. 비목나무는 뱀처럼 껍질을 벗는다는 ‘베염’에 작은키나무라는 뜻의 ‘푸기’ 혹은 ‘페기’가 붙은 것인데 이걸 받아 적는 과정에서 비목나무가 되었다. 지금은 국가표준식물명이라면서 이 이름을 표준어라하고 ‘베염푸기’는 방언으로 밀려났다.

 그렇게 숲은 바뀌고 있었다

힘들지 않게 오른 남북으로 경사가 진 정상 능선을 따라가다 보면 겨울딸기 군락을 만나게 된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남향을 향해 자라고 있는 모습이다. 이미 열매는 지고 온몸에 융털을 달고 있는 초록 잎 덕분에 겨울을 날 수 있나 보다. 하얀 꽃이 만발하게 필 9월쯤 다시 오리라 맘먹어 본다. 또 오르미들이 내어준 발길 따라 상수리나무가 자란다. 그들이 상수리나무 주변을 지났는지 그건 알 수 없지만, 떨어진 낙엽 덕분에 겨울딸기가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빛을 찾아온 건 그들만이 아닌 낙엽활엽수들이 함께 했다. 그렇게 숲은 바뀌고 있었다.


▲ 진남못 앞에서. 앞에 말이 놀고 멀리 좌보미오름과 월랑지가 보인다.(사진=김미경)

월랑지 주변은 곶자왈이다. 대부분 빠르게 흐르는 용암이 바깥은 빨리 식고 안은 아직 뜨거운 채 흘러가면서 동굴을 만들어 내며 판형으로 굳어진 용암으로 습지를 이루고 있다. 이 일대는 어떻게 보면 습지가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환경이다. 초원 속 습지는 그곳에서 살아가는 생명체들에게 중요한 생명줄 같은 역할을 한다. 넓게 분포된 ‘진남못’, 그 둘레를 돌담으로 두르고 소나 말들이 드나들 수 있는 입구 쪽만 터져 있는 것을 보면 이렇게 아직도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찾아갔을 때는 가뭄이 들어 땅이 갈라지는 모습이었지만 방목해 놓은 말들과 그 속에 살고 있는 송이고랭이를 볼 수 있었다.


▲ 지난해 9월, 진남못의 모습(사진=김미경)

▲ 그사이 겨울가뭄으로 진남못의 바닥이 갈라졌다.(사진=김미경)

쉽고도 정겨운 ‘ᄃᆞᆯᄆᆞᄅᆞ(달마루)’ 놔두고 한자어로 불러

월랑지라는 오름의 지명은 한자어일 것임에 틀림없을 터다. 월랑지란 이름에서 못을 연상할 수 있다. 바로 이 오름 곁에 못이 있으니 더욱 그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이 지명은 이 오름 이름이라고 한다. 월랑지란 ‘ᄃᆞᆯᄆᆞᄅᆞ(달마루)’를 한자로 표기한 것, 여기서 ‘ᄃᆞᆯ’을 ‘월(月)’로 표기했는데, 그것은 ‘달’이 아니라 ‘물’의 뜻이라고 한다. 오늘날의 국어에서는 ‘도랑’이라는 말에 그 흔적이 화석같이 남아 있다. ‘마루’는 위가 평평하다는 뜻이다. 월랑지오름은 근처에 물이 있고, 위는 평평한 오름. 월랑지오름. 선조들은 ‘ᄃᆞᆯᄆᆞᄅᆞ(달마루)’라고 그 뜻을 쉽고도 간명하게 담았다.

월랑지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읍리 산5번지
표고 260.2미터 자체높이 35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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