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구 침략에서 주민을 품어준 오름, 호수 같은 연못도 품었다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18) 녹남봉
강정드르 도원드르 드넓은 평야 가운데 오름
사람들이 오름을 찾는 이유는 제각각, 하지만 다른 마음으로 찾아든 사람들의 발걸음을 받아 안은 오름은 언제나 한결같다. 안다고 찾아간 발걸음은 오름에 맡기는 순간 허언임을 알게 된다. 오름은 어떠한 차별도 없이 저마다의 사연을 가진 걸음을 품어주니 다시 또 그곳을 찾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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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12코스 지나는 길에 녹남봉을 오른다. 녹남봉, 바닷가 방향으로 마을이 오롯이 자리 잡았다. 나머지 삼면은 농토가 넓게 펼쳐진다. 강정드르, 도원드르라는 이름처럼 넓은 평야가 펼쳐지면서 가까운 가시오름부터 모슬봉, 단산, 산방산, 저 멀리 군산까지 한라산과 이어지면서 이곳을 품어 안은 듯한 모습이다.
오름 앞에 자리잡은 신도리, 행정구역상 서귀포시 서쪽 끝 마을이다. 설촌 당시 어업을 주업으로 모여 살았지만, 왜구들이 포구를 중심으로 노략질이 심해 조금 떨어진 녹남봉을 의지하여 촌락을 이루었다고 한다. 광활하고 비옥한 농경지를 터전으로 삼았다. 1599년 당시 ‘윤남못’ 등 음료수원으로 마을을 이루었다는 기록이 있다. 대정읍에서도 습지가 유난히 많아 침수 위험이 잦았던 신도리, 어쩌면 이곳은 물과 많은 사연이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면서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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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이 50미터,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편안한 길
오르는 길은 옛 신도국민학교 쪽과 남쪽 무릉도원로에서 진입할 수 있다. 자체 높이가 50미터라 산책하듯 오를 수 있는 편안한 길이다. 서쪽 초입으로 들어서면 천선과나무가 탐방로를 따라 군락을 이룬다. 탐방로는 터널 형태를 이루어 운치가 있다. 겨울엔 푹신한 낙엽을 밟을 수 있지만 가을이면 노랗게 물든 단풍을 볼 수 있다. 바람이 몹시 부는 겨울 어느 날 다시 찾은 녹남봉, 무릉도원로 안내판에서 걸음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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밖에서 바라본 풍경은 혼자 들어가기에 음침한 기운이 돌기도 하다. 곰솔이 가득한 숲이다. 탐방로를 따라 들어간 안의 모습은 그 느낌과는 전혀 다르다. 숲 안은 어린 곰솔들이 빽빽이 차지하고 있고 어린 까마귀쪽나무와 후박나무들이 빈틈을 비집고 자라고 있다. 숲 안은 낙엽이 진 틈 사이로 제각기 살아가는 모습이다. 머리 빼꼼히 내밀어 무엇이 있을까 찾아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렇게 발걸음이 닫는 곳은 이미 떨어진 솔잎이 가득하고 드문드문 보이는 빨간 말오줌때 열매가 겨울의 삭막함을 해소시켜 준다.
자라는 수목을 감당하기 어려운 전망대
녹남봉 정상은 원형으로 한 바퀴 돌아 나올 수 있다. 돌아가는 동안 분화구 안은 서쪽에서 볼 수 있다. 여러 SNS 상에는 꽃밭을 조성하고 있다거나 백일홍의 알록달록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얘기가 떠돌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볼 수 없다. 이곳 어르신을 만나 말씀을 나눠보니 자기 비용이 많이 들기도 하고 힘들어서 이제는 꽃밭 가꾸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오름 정상을 찾는 오름 오르미들의 즐거움이 한 사람의 희생으로 얻어졌던 것, 아쉬움이 남는다. 하지만 분화구 가운데는 감귤 과수원이 조성되어 봄이면 감귤꽃 향기로, 가을 겨울이면 노랗게 익어가는 감귤의 모습으로 대신 달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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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도 자라는 수목을 감당하기 어려웠는지 팔각정 낮은 쉼터가 이제는 층고가 높은 전망대로 바뀌었다. 다행히 바라보이는 풍광으로 올라온 이들에게 또 다른 감상을 준다. 숲 가꾸기가 어쩌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도 든다.
녹남봉이란 주위에 못이 있고 낮은 오름
녹나무가 많아 그렇게 불렸다는 녹남봉, 설촌 당시 이곳에 녹나무가 있었을까? 제주도 말로는 당연히 녹남봉이니 녹나무와 관련 있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몇 군데 녹나무 자생지가 있는데 왜 유달리 이곳에만 녹나무와 관련한 이름이 붙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무언가 궁금해지면 그 의문이 풀릴 때까지 자꾸 생각나게 마련이다.
제주도의 여러 곳을 다녀보면 녹나무가 자라는 곳은 오름이 아니다. 주로 계곡이거나 곶자왈 같은 곳이다. 이렇게 노출된 오름에 녹나무가 자라는 곳은 어디를 찾아봐도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그저 이름이 녹남봉이니 막연히 녹나무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믿음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최근 이런 관점과는 상당히 다른 설명이 있어 눈길을 사로잡는다.
녹남봉이란 호수가 있는 낮은 오름이라고 한다. 녹남봉의 녹남은 녹나무가 아니라 녹+남의 복합어라는 것이다. 여기서 ‘녹’이란 백록담의 ‘록’처럼 호수를 나타내는 말이라고 한다. ‘남’이란 ‘낭’으로도 발음하는데 낮은 산의 의미를 갖는 말이라고 한다. 녹남봉 주변에는 윤남못을 비롯해 유별나게 못이 많다. 강정드르니 도원드르도 물과 관련이 깊은 지명들이다. 녹남봉이란 못이 있고 낮은 오름이로구나 하는 설명에 수긍이 간다.
녹남봉
서귀포시 대정읍 신도리 1304번지 일대
표고 100.4미터 자체높이 50미터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본 기획을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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