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호수엔 볕이 들고 숨골에선 찬바람, 숨어서 더 돋보인다

[김미경의 생태문화 탐사, 오름 올라 ①] 마른 섬에 물을 품은 오름들 (1)

 두메 깊숙한 곳에 들어앉은 오름

두메 깊숙한 곳에 들어앉아 오히려 돋보이는 오름, 오름 나그네의 저자 김종철의 표현이다. 두드러진 몸매도, 가까이하기 좋은 오솔길조차도 갖춰지지 않았다. 다가갈수록 짙푸르게 숲에 싸인 웅숭깊은 몸가짐에는 외진 들녘에서 자적하는 넉넉함이 풍긴다. 그렇다. 영아리오름은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끌지는 못하지만 오름을 오르기 시작하면 색다른 매력을 만날 수 있다. 밖에서 볼 수 없어 더욱 그런 것인가. 오르기 전까지 어떤 모습인지 상상조차 쉽지가 않다.


▲ 마보기오름에서 남쪽을 바라본 풍광(사진=김찬수)

영아리를 오르는 길은 여러 길이 있다. 함께 오르길 바란다면 항상 마보기오름으로 가는 길을 택한다. 짙은 삼나무 군락을 시작으로 벌써 달라지는 향기는 침엽수림의 피톤치드가 뿜어내는 상쾌함이다. 향기에 취하기도 전에 발걸음은 용암이 흘러 만들어 낸 흔적 위로 지나가고 있다. 어느 사이 바깥세상을 다 잊어버리고 그곳의 모습에만 집중하게 된다. 여름을 지나 가을맞이하는 문턱에서 드문드문 보이는 보라 빛깔 야생화는 함께하는 오르미들이 즐길 수 있는 또 다른 꺼리가 된다.

어느덧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 가시덤불과 잡목들이 우거진 언덕배기를 오르니 마보기오름 정상이다. 동쪽으로는 어오름, 서쪽으로는 하늬오름, 북쪽은 이돈이오름이다. 이들은 저 멀리 숨어 있는 듯 아직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영아리오름을 둘러싸고 있다. 침엽수들만이 진하고 연한 색깔을 반복한다. 단순할 것만 같은 이곳은 곧 특별한 생태계를 드러내 보인다.

한라산 정상아래 수많은 오름 중 한 곳, 마보기오름에서 바라보는 영아리오름은 정말 나그네의 말처럼 특별함은 없어 보인다. 안으로 들어가 보지 않고서는 독특한 그 오름의 모습을 맞을 수 없다.

 자연의 입장에서 바라본 삼나무 숲

그곳을 가기 위해 지나는 억새길, 초록이 무성한 한여름에도, 억새까락에 빛이 부딪쳐 부서지는 눈부신 어느 가을날에도, 사람 키보다 훌쩍 커버린 억새 사이로 걷기를 바래본다. 사르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앞의 모습이 빠르게 열렸다 닫혔다 반복하기를 영화 속 한 장면처럼 황홀하다. 직접 걸어보지 않고는 누구도 그 느낌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자연이 주는 길이다. 오직 그곳을 오르는 오르미들만이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 삼나무 숲. 서로 기대어 자라면서 인간에게 휴식과 위로를 준다.(사진=김미경)

어느덧 오름 들머리에 들어서면 바람과 나무가 발길을 잡는다. "나무가 춤을 추면 바람이 불고 나무가 잠잠하면 바람도 자요"라는 윤동주의 시구가 떠오른다. 잠시 숨을 고르고 바람이 가져다주는 시원함을 느껴본다. 사방에서 나뭇가지 사이로 타고 오는 바람은 기분 좋은 향기다. 나무에 살짝 기대어 온몸의 힘을 빼고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쉼을 가져본다.

영아리오름을 마주한다. 편백과 삼나무가 무성한 숲속은 비스듬히 들어오는 빛을 받기 위해 나름의 키 높이와 쭉 뻗은 몸매를 자랑하며 어둠을 밝혀주고 있다. 어쩌면 자기의 진짜 몸매를 자랑하지 못하는 아쉬움도 있다. 하지만 지금, 그 자리에서 누군가에게 위로를 주고 안식을 준다.


▲ 삼나무 숲에 자라는 이끼. 지구상의 녹색 개척자로 생태계를 건강하고 풍요롭게 한다.(사진=김미경)

침엽수의 꽃가루 때문에 문제가 된다고 오래된 삼나무를 잘라내는 이유를 든다. 물론 단순히 한 가지 문제 만 있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사려니 숲의 국내 최고령 삼나무 숲을 보라. 나무가 ‘이렇게 웅장하고 멋있게 자랄 수도 있구나’라며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른다. 아이러니하게도 우린 삼나무 숲을 찾아다니며 힐링하고 있다. 인간은 자기 위주로 생각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역지사지, 그 속에 살고 있는 생명체들 생각을 조금이라도 한다면 우리들의 편리성을 목적으로 쉽게 생태계를 파괴할 수 없을 것이다. 숲이 주는 항상성을 믿기엔 현실은 너무 가혹하기만 하다.

 깊은 산속에 오롯이 남아 있는 생태계, 영아리오름의 분화구호

어느 순간 탁 트인 공간에 햇빛이 쏟아짐을 느낀다. 습지다. 물은 꽤 깊어 보이지만 가운데까지 풀들이 꽉 들어찬 걸 보면 아무리 깊어도 1미터를 넘지 않을 것 같다. 직경 100m 정도의 둥그런 모양이다. 초원과 숲을 지나 울창한 자연림 속에 이런 생태계가 있다니 경이로움 그 자체다.


▲ 10월의 영아리 습지. 야생 동식물의 천국이다.(사진=김미경)

국제적으로 중요한 습지에 대해 보호 조치가 진행되는 곳, ‘남사르습지’로 지정한다. 제주에는 천백고지, 물영아리, 물장오리, 동백동산, 숨은물벵듸 습지다. 생명체가 살기 위해서는 물은 소중하다. 특히 사면의 바다로 둘러싸인 섬 제주도에서는 물은 더욱더 귀할 수밖에 없다. 어느 곳 하나 물이 있는 곳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행기물’이라고 불리는 영아리습지, 오래전부터 인간뿐만 아니라 이곳을 오고 가는 생명체들에게 생명수 같은 역할을 했으리라. 이 아름답고 잘 보존된 습지를 보자면 왜 람사르습지 지정에서 빠졌는지가 궁금해진다.

영아리오름은 신령스럽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고대 사람들은 물 또는 바위가 있어서라고 모 학자는 이름 어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쩌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 붙여졌을지도 모른다. 이곳에서 느껴지는 정기로는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으리라. 울창한 숲속을 걷다가 마주한 이곳, 쏟아지는 감탄사가 그것을 대변한다.


▲ 영아리에서 만난 것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행기소-꽃여뀌-숨골-넉줄고사리(사진=김미경)

마른장마가 오래되면 물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쩍 갈라지는 표면에 무슨 생명체가 살까 싶지만, 장마가 지속이 되면 습지식물들은 어느 순간 다시 올라온다. 세모고랭이, 송이고랭이, 좀매자기, 기장대풀, 흰여뀌, 눈여뀌바늘, 마름, 택사 ,골풀, 도깨비사초 뿐만 아니라 주변 식물인 넉줄고사리의 모습 또한 특별하게 만날 수 있다.

햇빛이 강한 여름 한나절, 생명력을 느낄 수 있는 진초록의 모습은 잠시 휴식을 취한 오르미의 눈길을 끌 만 하기에 충분하다. 깎아내린 듯한 커다란 바위들, 시원한 지하 공기를 내뿜는 궤, 표면에 습기를 머금고 자라나는 이끼와 덩굴식물들의 모습은 더욱 신비스럽기만 하다. 어느새 ​복잡한 머릿속을 맑게 정화 시켜 준다.

영아리오름

안덕면 상천리 산24번지
표고 693m, 자체높이 93m


김미경

오름해설사, 숲해설가 등으로 활동하는 프리랜서다. 오름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 사단법인 오름인제주와 한라산생태문화연구소 사무국장으로도 열심이다. 한림북카페 책한모금을 운영하면서 오랫동안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0여 편의 생태문화 관련 글과 사진을 게재해 왔다. 이번 연재를 통해 수많은 독자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마당을 만들어 갈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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