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게으름을 비집고 올라선 하얀 트럼펫

[주말엔 꽃] 계요등 꽃

여름은 야생의 천국이다. 온갖 야생의 것들이 귤 농장을 찾아와 기승을 부린다. 농부는 무더운 날, 이런 것들과 일전을 치러야 한다.

여름에 가장 힘든 일은 풀과 치르는 전쟁인데, 그 가운데 가장 귀찮은 건 덩굴식물이다. 이런 것들이 나무를 타고 오르기 시작하면, 나무 한 구루를 덮든 건 순식간이다. 게다가 귤나무 뿌리 근처에서 나오기 때문에 예초기로도 제거하기 어렵다.


▲ 계요등이 귤나무를 타고 올랐다.(사진=장태욱)

농장에 풀을 베고 돌아서니 계요등이 주인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 꽃을 펼치고 있다. 처음엔 흰색 형광등처럼 길쭉한 꽃망울이 줄기 끝에 빼곡하게 맺히더니 하나둘씩 꽃의 끝을 펼친다. 꽃이 피면 끝은 다섯 갈래로 벌어지는데, 그 모양은 영락없이 트럼펫을 닮았다. 트럼펫의 벨에 해당하는 부분의 안쪽은 보라색이다.

계요등은 낙엽성 덩굴나무이다. 그러니까 겨울이 되면 잎을 떨구기 때문에 농부의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가 봄이 나면 잎이 돋고 줄기가 나무를 타고 오른다.

계요등의 계(鷄)는 닭, 요(尿)는 오줌, 그리고 등(藤)은 등나무를 의미한다. 잎과 줄기를 자르면 닭오줌과 같은 좋지 않은 냄새가 나는 넝쿨식물이란 의미인데, 이름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

일단 계요등의 줄기나 잎에서 그렇게 고약한 냄새가 나지 않는다. 조류는 배설작용으로 요산을 배출하는데, 요산이 물에 녹지 않기 때문에 오줌이 아닌 똥에 섞여 나온다. 닭은 오줌이 없는 동물인데, 계요(鷄尿)라니 가당키나 한가?

계요등의 잎은 끝이 뾰족한데, 한 쌍이 서로 마주 난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서 잘 자라고 주로 충청도 이남에 자생하는 걸로 알려졌다. 그런데 최근엔 지구온난화로 인해 수도권에서도 발견된다고 한다.


▲ 가지 끝이나 겨드랑이에 꽃대를 내고, 거기에 형광등 모양의 꽃이 달린다.(사진=장태욱)

계요등은 줄기 끝이나 겨드랑이에서 꽃대가 나오는데, 꽃대에 송이송이 하얀 꽃이 달린다. 그리고 하얀 꽃 끝부분에 자주색 반점이 드러나는데, 아기가 보라색 루즈를 입술에 발라놓은 것처럼 보인다.

외관상으로는 청순하고 아름다운 꽃인데, 농부는 그 유혹에 절대 넘어가면 안 된다. 계요등은 농가에 치명적인 피해를 안기는 볼록총채벌레의 기주식물, 즉 먹이가 되는 식물이기 때문이다. 볼록총채벌레는 성충인 상태로 귤나무나 덩굴성식물에서 겨울을 난다. 그리고 5월부터 시작해서 1년에 7세대에 걸쳐 번식한다. 6월에 발생해 나오는 2세대부터 불록총채벌레가 가장 좋아하는 기주식물이 계요등이다. 농부는 계요등의 환한 살인미소에 속지 말고 여름이 다가오기 전에 보이는 대로 신속하게 제거해야 한다. 이건 제주도농업기술원이 발표한 자료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 길쭉한 잎이 쌍으로 마주난다.(사진-장태욱)

그런데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다. 덩굴식물이 자라는 속도가 너무나 빠른 데다, 나무를 끼고 자라기 때문에 일일이 손으로 제거해야 한다. 여름에 일을 하려니 몸은 땀으로 범벅이 된다. 쉽지 않은 일이다.

농장 안으로 들어서니 나를 보며 비웃기라도 하는 듯, 계요등이 보라색 입술을 드러내며 환하게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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