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울하면 출세? 능력주의는 패자의 고통을 정당화한다

[북 리뷰] 박권일 저 「한국의 능력주의」(이데아, 2021)

강준만은 일찍이 한국사회를 ‘각개약진 공화국’으로 진단했다. 구성원 다수가 공적 영역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고, 그래서 각각의 문제를 공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혹은 가족적 단위에서 해결하려고 한다는 지적이다. 개인이 어려움을 겪거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억울하면 출세하라”라는 말을 듣는다. 한국에서 출세하려면 공부해서 어려운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한국은 시험에 중독된 나라다. 아이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시험을 통해 성적을 확인하기 시작해 성인에 이를 때까지 시험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특히, 대학을 입학하기 위해 치르는 입시는 모든 가족의 돈과 시간을 걸고 참전하는 전쟁터다.


대학을 졸업하고도 각종 시험이 기다린다. 행정고시, 임용고시, 외무고시, 기술고시, 입법고등고시, 법원행정고등고시 등 각종 고시가 있고, 공무원 시험과 대기업 공채 시험이 있어 많은 젊은이들이 고시원에서 시간을 보낸다. 언론과 시민사회가 수십 년째 입시경쟁과 시험공화국의 폐해를 지적하지만, 사회는 꿈쩍도 않는다.

「한국의 능력주의」(이데아, 2021)는 시험에 매달리는 한국사회 기저에 깔린 능력주의를 분석하는 책이다. 부제가 ‘한국인이 기꺼이 참거나 죽어도 못 참는 것에 대하여’인데, 결론을 말하자면 참는 것은 (결과의)‘불평등’이고 못 참는 것은 (과정의)‘불공정’이다.

능력주의는 노력과 그 결과에 따른 보상이 정당하다는 인식체계인데, 한국인 대부분이 능력주의가 세습 신분제에 반하는 것이므로 공정하다고 인식한다. 한국의 능력주의는 시험을 통한 지대추구로 표출되는데, 이렇게 시험에 매달리는 이유는 시험보다 공정한 방법을 찾지 못하기 때문이다. 사회 구성원 다수가 시험 한 번으로 인생을 결정하는 방식을 선호한다.

이런 능력주의가 가진 결함이 있다. 우선, 과연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는 것이 온전히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것인지 짚어봐야 한다. 개인의 노력에 대해 부모의 경제력, 사는 지역의 환경 등이 시험 결과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능력에 따른 사회적 보상이 정당하다고 보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산출하는 경제적 혜택이 모두 그의 노력으로만 산출되는 것이 아니므로 능력이나 기여도에 따라 경제적 혜택을 산출하는 것은 마땅히 받을 만한 게 아니다’라는 롤스의 지적과 맥이 통한다.

능력주의가 시험의 결과 주어지는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다. 고시에 합격한 사람에게 과도한 보상을 주고, 대기업 공채 역시 합격자에게 정규직 일자리와 고소득 안정적 지위를 보장한다. 반면에 낙오한 사람에게는 비정규직 저소득 일자리마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서울교통공사,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정규직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기저에 불평등은 용인하되, 불공정에는 참지 못한다는 심리가 깔려 있다. 시험을 제외하고 개인의 경험과 숙련도, 조직에 대한 기여 등은 절대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한국은 제도가 민주화되고 소득이 증가했지만, 공공성, 타인에 대한 배려, 소수자·약자에 대한 관용 수준은 좀처럼 높아지지 않는다. 저자는 한국이 촛불혁명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에 대한 강한 선호와 낮은 자기표현 가치 때문에 효과적 민주주의 사회에 이르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능력주의에도 급이 있어 현실적 능력주의와 이상적 능력주의가 있다지만, 능력주의가 승자독식을 정당화해 세습사회 못지않게 폐해가 크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다. 저자는 한국사회에서 부자들의 기여는 과장되고 노동자의 기여는 과소 표현됐으며, 따라서 부자가 누리는 극단적 풍요와 빈자가 감내하는 극단적 고통은 모두 부당하다고 역설한다.

능력주의 사회의 종착점은 불평등. 저자는 불평등을 완화할 수단으로 최고 임금제, 누진소득세, 최상위-최하위 소득 연동제, 경영자의 과도한 임금에 법인세 인상, 기본소득제, 고용보장제 등 다양한 정책대안도 제시했다.

책은 저자의 석사논문 「한국의 능력주의 형성과 그 비판 : 《고시계》텍스트 분석을 중심으로〉(성균관대, 2018)을 보완해 발표한 것이다. 책의 원재료가 학위 논문이기 때문에, 학자의 이름과 논문의 제목이 페이지마다 빼곡하게 등장한다. 주석과 참고문헌만 39페이지, 이쯤 되면 대중서적의 길을 포기한 책으로 봐야 한다.

독서모임을 함께하는 동료 회원은 “책을 읽다가 몇 번이나 덮었다. 진도를 뺄 수가 없었다. 독서모임이 선정한 책이 아니었다면 포기했을 책이다.”라고 말했다. 일반인 독자의 가독성을 고려하지 않고 쓴 책이라는 불평이다. 그럼에도 2023년 11월 기준으로 책을 10쇄나 찍었다니, 저자의 명성과 책의 주제가 크게 위력을 발휘한 것으로 보인다.

내용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능력주의 사회의 그늘인 불평등을 지적하는 책인데, 그 불평등의 문제가 구체적으로는 드러나지 않았다. 한국사회에는 고졸과 대졸, 정규직과 비정규직, 여성과 남성, 수도권과 지방 등 불평등을 낳는 수많은 축이 있는데, 저자는 그걸 분석하는데 소홀했다. 능력사회 문제의 분석 틀을 이해하는데 너무도 많은 페이지를 소진한 나머지, 문제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은 것에 아쉬움이 남는다.

그럼에도 저자가 내린 진단, 그것만으로도 울림이 적지 않다. '능력주의는 불평등을 재생산한다.'

저자 박권일은 2000년대 초반에 월간《말》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2007년에는 우석훈과 함께 「88만원 세대」(레디앙)를 발표해 청년 비정규직 문제와 세대 간 불평등 문제를 지적해 이름을 알렸다. 그 이후 많은 책을 썼고, 지금은 독립연구가이며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을 준비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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