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도 머리도 노랑한 화전민 송 씨, 토벌대 안내하다 끝내는..”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⑮] 가시리 영아동화전과 상비동화전

■가시리 영아동화전

영아동화전은 표선면 가시리 3727, 3730번지 언덕 일원에 있었던 목장화전이다. 목장길이 신흥리와 이어져 있어서 주민들은 신흥리 마을과 교류가 많았다. 1918년 제주지형도에 집 8채가 보이는데 1945년 항공사진에는 없는 것으로 보아, 해방 전후로 사리진 마을임을 알 수 있다.


▲ 조선총독부가 1918년 발행한 한라산 5만분의 1 지형도에 나타난 영아동화전과 상비동화전(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영아동은 신흥리에서 우마를 올리던 목장길 선상에 있었다. ‘여우내’라 불리는 남원읍 신흥 2리와 영아동을 연결하는 길은 여우내-쉐목을동산-노린벡이-어쩌리오름 동쪽-올란도-너븐드르-펄물-뒷버들-중잣(산장잣)-영아동-신물화전지 이어졌고 위로는 태흥목장 ‘당드르’를 지나 국림담 안으로 이어졌다.


신흥리 김〇차(1932생)는 이 길을 통해 국림담 안으로 들어가 ‘동박머들’이란 곳에서 땔감을 해왔다고 증언했다. 이 땔감들을 지고 가서 표선리 송 씨 집안 술 공장에 팔았다고 한다. 토산리 김0문(1935생)은 “토산1, 2리와 세화 1, 2리가 운영하는 4리 공동목장 안에 있던 영아동에는 코도 노랑, 머리도 노랑한 송O선이란 화전민이 살았는데 제주4·3 때 토벌대 안내원으로 참여했으나 토벌대의 오인사격으로 고향 화전 마을터에서 사망했다”라고 증언했다. 이 사람은 해안지역에서 맡긴 소를 받아 키워주는 대가로 삯을 받아 생활했고 사냥도 많이 했다고 한다. 가시리 안좌동 현〇철(1935생)은 송〇선의 처가 해방 전에 노루고기를 팔기 위해 안좌동에 왔을 때면 노루를 사 먹었다고 회상했다.


▲ 상비동에 있는 국림담(사진=한상봉)


가시리 오〇식(1937생)에 따르면 어머니 김〇득은 본래 ‘여우내’ 출신으로 일제강점기에 외할아버지 김〇호가 일제의 선도교 탄압으로 영아동으로 숨어들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이모와 외할아버지는 영아동에 살게 되었고, 해방 전 어머니와 함께 이모를 보러 영아동으로 갔다가 이모가 삶아준 죽순을 먹었던 기억이 있다고 했다. 신〇련이란 사람도 영아동에 살았는데 그의 후손은 제주4·3 이후 선대가 살던 화전마을로 올라와 굿당을 차리기도 했다. 노루 사냥이나 오소리 사냥은 화전민들에겐 좋은 수입원이었다. 특히, 오소리의 털은 방한용 모자를 만드는 데 필요해서 그 값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송O선이 살았던 인근 여러 곳에서 대나무 지대가 보이는데, 김0문은 부 씨, 신 씨, 고 씨가 살았다고 증언했다. 당시 김 씨와 친하게 지내던 화전민의 후손 산〇학 씨는 제주시 삼양동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신 씨 할아버지는 우마 100여 마리를 키웠고 나중에 신흥리 ‘물도왓’으로 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 씨 집안은 가족공동묘지를 조성했는데, 후손들은 가시리 주민의 도움을 받아 조상 땅을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씨 후손들은 태흥리와 인근 마을로 이주했다. 영아동 사람들의 식수원은 솔내(송천)의 ‘배장물’이었다.


▲ 상비지화전에 집터가 보인다.

■가시리 상비지화전

가시리 산림지 인근에는 1918년 「조선오만분일지형도」 제주지형도에 보이는 상비지(上榧旨)라는 지명이 보인다. 위 지형도를 보면 상비지에는 모두 다섯 채의 집이 보인다. 가장 동쪽 ‘굴산전’ 화전지에 집 두 채, 북쪽에 두 채, 아래쪽으로도 세 채가 산발적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위 지역을 지번으로 보면 가시리 산 136번지 북쪽 끝 인근 냇가 변이 ‘굴산전(谷山田)’화전 집터이며, 가시리 3795번지 동쪽 50m 지점에 이장한 묘터가 있는데 그 아래에 돌담을 두른 집터와 마당 터가 존재했다. 가시리 3784번지 인근 삼나무 아래 ‘신득이모르’ 앞에도 집터로 쓰던 돌담이 허물어져 있다.


▲ 곶 안 상비동화전민이 살던 집터(사진=한상봉)

이와 관련하여 ‘신득이모르’ 고 씨 집안의 묘비에는 ‘신비못모르(新飛池旨)’라는 지명이, 인근 묘에는 ‘싱비물’이라 한글 지명이 보인다. 이들 화전민들이 이용했던 터는 각각의 위치가 다른데, 신비지에 살았던 화전민들은 가친오름 남서쪽 아래에서 화전 생활을 했고 산전 울담이 이곳에 분포했다. 가친오름을 의지해 바람을 막았고 평평한 이곳에 산전을 만든 것이다. 솔내(松川)의 지류인 가친오름에서 흘러내리는 냇가의 물을 식수로 이용했을 것이다.

<계속>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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