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전민 위건덕은 어딜 가고, 백화점 큰손 차지가 됐나?

[한상봉의 ‘제주도 화전’ ⑭] 가시리 해남굴화전

가시리는 하잣 위로 물찻오름 인근까지 목장과 산림을 이루고 있다. 물찻오름은 제주시와 서귀포시의 잣담이 서로 경계를 이루는 만큼 가시리 목장과 산림은 드넓다. 화전민들은 드넓은 목장과 산림을 무대로 여러 곳에서 목장화전과 산간화전을 일구며 삶을 영위했다.

이 가운데 녹산장에 있는 해남굴화전과 여문영아리 아래 영아동화전은 잘 알려진 곳이다. 싱비지화전과 붉은오름 주변 화전은 누가 살았는지 알려지지 않았다. 붉은오름 주변 화전은1918년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제주도 지형도에 흔적을 보일 뿐이다. 그 외로 산발적인 단독거주 화전도 있었다.


▲ 태흥목장 주변 여러 곳에 화전이 있었다. 제주 5만분의 1 지형도(국토지리연구원 소장)


■가시리 해남굴화전

가시리 3796, 3665번지를 비롯해 그 주변에 산 번지가 아닌 일반 번지가 부여된 지역이다. 이 지역에 일반 번지가 부여된 것은 조선총독부가 1912∼1915년 사이 토지조사사업을 벌일 때. 소유권을을 주장했던 주민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당 지번 토지에 올레길이나 조밀한 집 번지 구성이 없는 것으로 보아 오래도록 사람이 살지 않았음을 알수 있다. 조선 후기에 사람들이 들어와 화전을 일구며 살다가 일제강점기 이전에 어디론가 떠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 해남굴화전 터(사진=한상봉)

해남굴에는 위덕건이란 사람이 살았다고 전해지는데 그가 언제 해남굴로 들어와 언제까지 살았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해남굴에는 대나무와 인근 하천에 물이 있는 등 사람이 살았다는 근거는 충분하다. 또한, 동쪽 산장 잣을 넘어 성읍리 진펭이굴화전과 가까이 위치한데다 지대가 주변부보다 낮아 바람을 막기에 적당하다. 여기에 곡식을 재배할 넓은 땅까지 있어 화전지역으로 선정될 여건은 충분해 보인다. 냇가의 물과는 별도로 화전 인근에 ‘거머리흘물’이 있어 목축을 하기에도 여건이 좋았을 것이다. 


녹산장은 산마장의 하나였다. 심낙수 제주 목사는 1794년 「목장신정절목(牧場新定節目)」에 기록하기를 녹산장에 사람이 들어와 경작했고 목장경작 세금을 피(稷)로 납부한다고 했다. 납부된 세금은 일부는 비축하고 일부는 감목관과 테우리들에게 주도록 정하고 있다. 위건덕은 이 시기에 목장지 경작을 위해 들어 온 화전민으로 추정된다.


▲ 싱비못물, 화전 주변에 연못이 있어 소를 키우기에도 좋았을 것이다.(사진=한상봉)

『20세기 전반의 제주도』에는 지질학자 ‘다치이와 이외오’(立岩 巖)라는 지질학자 이름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에 일본 후쿠시마 현에서 태어났고 성인이 돼서는 지질학자로 살았다. 동경제국대학 지질학과를 졸업한 직후에 지도 교수의 권유로 1919년도에 조선에 들어왔다. 그리고 조선 지질조사소 지질기사로 활동하는 가운데, 조사를 위해 제주도를 방문했다. 『20세기 전반의 제주도』에 그가 녹산장에서 1박을 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그가 머문 곳이 해남굴임을 알 수 있다.

해남굴 화전민이 떠난 후 일제강점기에 녹산장은 국유지로 변했다. 해방 이후에는 김시근이란 사람이 녹산장 3000정보 중 1600정보(480만평)를 소유하고 있었다. 김시근는 소섬(牛島) 김석린(金錫麟)의 손자로 주사, 서기, 도 서기, 참사관을 지낸 인물로 사업가이기도 하다. 녹산장은 1939년 평안남도 출신 화신백화점 사장으로 잘 알려진 박흥식에게 넘어갔다. 박흥식은 당시 돈 50만원에 녹산장을 산 후 제주도흥업(주)을 세웠는데, 사업 목적은 군마(軍馬), 면양(緬羊), 개간 등이었다. 실제로 면양 수 백두, 축우(畜牛) 수 백두를 키웠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잡지:1939.4.1일자.「삼천리」 제11권 제4호)
일제 말기엔 해남굴에 경상도 인부들이 들어와 창고를 짓고 축산을 시작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해남굴 인근에 비행장을 만들며 도민들이 2∼3달 간 동원되기도 했다.
가시리 오〇현(1933생)은 해남굴에는 일본인과 육지 사람이 들어와 쟁기보다는 좋은 기계를 이용해 목장밭을 일구었다고 증언했다. 그는 12살에 이곳을 지나며 본 광경에 대해 ‘집이 3채 있었으며 주민들은 소를 이용해 곡식을 파종했다’고 말했다. 해방이 되자 주민들은 해남굴을 떠났다. 그런데 제주4·3으로 가시리 주민이 살던 집들이 대부분 불타서 사라졌다. 가시리 사람들이 집을 복구하는 가운데 해남굴에서 4각으로 잘 다듬어진 나무와 돌담을 실어다 집을 지었다고 한다.


▲ 가시리 3792번지에 화전민의 집터가 있다.(사진=한상봉)

한편, 해방이 되자 박흥식은 반민특위에 체포되어 체포되기도 했다. 5.16 때에는 부정축재자로 몰렸다가 경제재건촉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며 화려하게 부활했다. 하지만 사업을 무리하게 확장하다가 경제적으로 몰락했다. 그 과정에서 1972년, 18억 원을 받고 녹산장을 한진그룹에 매각했다.

해남굴은 현재 목장 초지로 이용되고 있지만 지금도 당시에 사용했던 그릇과 시멘트 파편을 볼 수 있다. 인근 언덕엔 제주4.3 이후 만들어진 삼각형 형태의 해남굴주둔소 흔적이 남아있다.

한상봉 : 한라산 인문학 연구가
시간이 나는 대로 한라산을 찾아 화전민과 제주4.3의 흔적을 더듬는다.
그동안 조사한 자료를 바탕으로「제주의 잣성」,「비지정문화재100선」(공저), 「제주 4.3시기 군경주둔소」,「한라산의 지명」등을 출간했다. 학술논문으로 「법정사 항일유적지 고찰」을 발표했고, 「목축문화유산잣성보고서 (제주동부지역)」와 「2021년 신원미확인 제주4.3희생자 유해찿기 기초조사사업결과보고서」, 「한라산국립공원내 4.3유적지조사사업결과 보고서」등을 작성하는 일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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